한 번쯤은 이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었다. 회피형 인간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물론 지극히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회피 성향이 짙은 인간이라는 걸 직시하게 된 걸 떠올려보면 직감으로 한번, 그리고 실제 성격검사에서의 수치로 한번 총 두 번이 있었다.
먼저 직감적으로 알게 된 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내 태도에서 발견했다.
엄마에게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어?라고 물으면 엄마는 이런 얘길 많이 들려줬다.
잘못한 거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끝내 아니라고 잡아떼고.. 고집이 얼마나 센데.
바라는 것도 많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다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얘기해 보면 안에 곪아있더라고.
그리고 친구들한텐 이런 얘길(원성을) 많이 들었다.
너는 왜 먼저 연락을 안 해?
내가 너하고 친한 사이는 맞아? 가끔은 네가 좀 멀게 느껴져
사실 이 이야기들을 조합해 보면 그냥 좀 딱딱하고 표현 잘 못하는 소심한 인간 정도로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근간에는 거절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인간이 있었다.
그래, 나는 겁이 났다. 잘못이 들통나 나를 싫어할까 두려웠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고 나는 네가 1순위인데 너는 내가 1순위가 아닐까 봐 두려웠고. 그래서 자꾸 도망을 쳤던 거다.
잘못한 거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끝내 아니라고 잡아떼고.. 고집이 얼마나 센데.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혼날까 봐 두려워서 그냥 잡아뗐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었다. 들킬걸 알았는데도 그냥 끝까지 잡아떼면 괜찮은 줄 알았다.
바라는 것도 많지 않고 스스로 워낙 다 알아서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얘기해 보면 곪아있더라고.
알아서 하는 게 더 편했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면 누군가한테 부탁 안 해도 되니까. 부탁하면 거절도 있는데 부탁 안 하면 거절도 없다.
너는 왜 먼저 연락을 안 해?
내가 너하고 친한 사이는 맞아? 가끔은 네가 좀 멀게 느껴져
먼저 연락해서 거절당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맘 편하다. 나는 거절할 일 없지만 누군가는 나를 부담스러워하고 거절할 수 있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절, 비판을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나만의 규칙들이 만들어졌고 대략 생각해 보면 이런 것 들이다.
1. 거절당할 바에야 처음부터 부탁도 안 한다.
2. 나도 거절하는 게 싫으니까 거절을 할만한 상황자체를 잘 만들지 않는다.
3. 가끔은 주변에 의지하고 싶지만 부담될까 봐 의지하지 않는다. 날 부담스러워하는 게 더 싫으니까.
두 번째 나의 회피 성향을 직시한 건 회사에서 제공하는 종합성격기질검사 테스트에서 숫자로 봤을 때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회피성향이 두드러지게 높게 나와 흠칫했던 기억이 있다.
오은영 박사님이 만약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분명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가족관계 등 유년시절에 대해 물어볼 테지.
최근 매체에서 심리상담, 토크쇼를 보면 항상 가정환경에서의 원인을 찾아서 나 역시도 생각해 봤다. 어린 시절 내가 혹시.. 학대라도 받았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크게 기억 남는 매몰차게 거절당한 기억이 없는 거다. 사랑과 지지가 부족한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족 간의 끈끈함과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고 충분히 넘친다.
혼자 추측하기로는 그냥 기질, 성향적으로 태어나길 겁도 많고 조심성이 많은데 원인 모를 이유로 거절, 상처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한 게 아닐지 생각한다. (자세한 원인까지 알려면 전문적인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 내가 글을 적는 건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이제 나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 회피형 인간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는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일단 내 직무는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동료들과 관계성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회의도 많고 발표도 꽤 있다. 대부분이 부탁의 연속이고 거절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거절당하는 게 죽기보다 싫은 성향의 인간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 부탁이라니.. 일에서는 그래도 일이니까 하며 어차피 내 관계밖의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상처는 받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안 볼 인간이지. 나를 상처받게 할 가치조차 없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빠르게 정리된다.
문제는 내 진짜 관계들이다. 가족, 친구, 연인, 정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의 내 모습에서 나는 의도하지 않게 거절당할까 봐 그들을 먼저 거절하고 적절한 거리를 계속 두고 있었다.
일단 내가 어떤 성향인지 알았고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걸 아는 순간 더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극복해보고 싶었다. 아래는 내가 한 그동안의 노력들이다.
1. 내가 어떤 성향인지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큼은 꼭 알린다.
내 성향에 대해 전달하려 애썼다. 내 성향이 이렇다는 것을. 그리고 내 진짜 동기와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자주 말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알리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폭이 넓어져 관계의 긴장감이 훨씬 완화되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져도 금방 수습이 되었다. 가장 좋은 건 나라는 사람을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리 가깝더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내 속마음을 모른다.
2. 어쩌다 거절과 비판을 당했을 땐 원인을 내 탓으로 만큼은 절대 돌리지 않는다.
거절,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온다. 상황이 닥쳤을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나에게 '역시 이것 봐, 애초에 내가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되었잖아?' '애초에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되었잖아?'로 생각의 길이 나면 그 길은 벼랑 끝으로 간다. 결국 날카로운 화살촉은 나에게 향하게 된다. 꼭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의 경우는 잠시 생각을 멈추려 산책, 운동하거나 책을 읽는 등 감정을 흘려보내고 나서 상황을 마주하려 했다.
3. 흘려보낼 관계는 흘려보내기로 한다.
가장 힘든 대목이다. 회피형 인간이 관계를 맺고 마음을 줬다는 건 엄청난 용기고 노력의 결실이다. 그렇기에 그런 관계들이 무너졌거나 상처받았을 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관계를 이어가 보려 내 마음은 돌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관계 회복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나만 알아서 회복하면 되겠지란 생각으로 얼기설기 붙인 관계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더 큰 상처로 돌아왔다. 관계란 한번 맺으면 풀 수 없는 게 아닌, 끊임없이 맺어지고 또 풀어지는 거란 걸 인정한다. 절대 멀어질 수 없는 관계란 없다는 걸 인정하며 흘러가면 흘러 보내기로 한다.
이 모든 노력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나는 노력 중이고 가끔은 잘 못해낼 때도 많아서 자신 있게 나의 회피성향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여전히 나는 관계가 어렵고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면서까지 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적는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관계에서 오는 불안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회피형 인간에게 있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나를 다 내보여주고 상처 좀 받아도 그까짓 거? 감히 네가?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고 관계도 잘 맺고 손절도 잘하고 부탁도 거절도 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런 성향의 나로 앞으로도 잘 살아가야 하니 조금은 건강한 방향으로 덜 상처받고 덜 아프게 앞으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다.
끝으로 나를 비롯한 회피형 쫄보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