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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Oct 07. 2024

뭔가에 미쳐있던 때

서른에 처음 배운 자전거로 유럽을 가다


시작은 자전거 유럽 여행이었다. 친구들은 모이기만 하면 몇 달 내내, 아니 일 년 내내 자전거여행 이야기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큰 프로젝트였고 항공권은 가장 싼 걸 고른다고 정말 1년 전부터 사뒀기 때문이다. 50일간의 유럽 자전거여행을 기다리며 친구들은 내내 행복해했다. 일생에 한 번뿐일지도 모를 기회니까. 다들 자전거샵을 팥바구니 쥐나들 듯 드나들며 자전거 관련 용품을 사고, 구글맵으로 루트를 짜고, 뭘 먹니 마니 어디를 들르니 마니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매번 소외감을 느꼈다. 친구들이 여행 계획에서 나를 제외시킨 건 아니었다. 항상 너도 같이 가자고 꼬시고 또 꼬셨다.


문제는 내가 나이 서른이 되도록 자전거를 못 탄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같이 갈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치 나도 여행을 함께 가는 것인 양 감정이 동화되더니 기어이 어느 날 툭, 그래 같이 가자고 답을 해버렸다. 그리고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유럽여행을 위해 난생처음 배우는 자전거.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마다 "운동은 어려서 배워야 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던가? 심지어 자전거는 말해 뭐 하리. 서른에 처음 배우는 자전거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물론 굴러가는 건 하루 이틀이면 됐다. 문제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가야 하고, 온갖 종류의 도로를 달려야 한다는데 있었다.


자전거가 어느 정도 굴러가기 시작하고 나서는 유턴을 집중 연습했다. 그리고 유턴도 어느 정도 된다 싶을 때 도로주행을 연습했다. 혼자였다. 서른에 누구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달라 하겠나. 지금도 서울은 한강변을 빼면 자전거 도로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때는 더 심했다. 연습하기 좋은 도로가 딱히 없었다. 그냥 비교적 한산한 도로를 찾아서 무작정 갓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몇 블록 가지 못하고 왔다 갔다만 반복하는데도 너무 무서웠다. 버스가 옆으로 지나갈 때 자전거가 살짝 휘청거렸다. 이렇게 몇 달 연습해서 유럽 자전거여행을 간다고? 이게 될 일인가 싶다가도 이번에 놓치면 영영 안 올지도 모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30대 초반 내내 자전거에 푹 빠져 있었다


별별 고생을 다하긴 했지만 자전거 여행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너무 많이 만들어 왔다. 몸도 엄청 가볍고 튼튼해졌다. 자전거 실력은 몰라보게 늘었고, 자전거와 관련된 지식도 엄청 쌓였다. 무엇보다 자신감.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자전거여행을 취미로 갖게 되었다. 여럿이든 혼자서든 틈만 나면 자전거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유럽 자전거여행 직후 정식으로 학원 강사가 되었기 때문에 50일짜리 유럽 여행은 계획하기 힘들었다. 휴가 기간은 남들과 달랐고, 학원 일정상 날짜를 빼기도 쉽지 않았다. 언제나 몇 달 전부터 학원과 협상하고 부모님, 학생에게도 휴강 일정을 공지해 놓고 여행 계획을 짰다.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면 몇 달 전부터 루트를 짜고, 블로그를 뒤지고, 자전거용품을 업그레이드했다. 덕질을 전혀 할 줄 모르고 가끔은 지나치게 뭔가에 몰입하는 걸 싫어하기까지 하는 성격에 자전거여행만큼 푹 빠져 있었던 경험이 있었을까 싶게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오랜만에 이전 블로그를 뒤지고, 굵직한 자전거여행 기록을 살펴봤다.


2005년에 유럽을 시작으로 (50일)

2007년에는 일본에 갔다. (15일) 그리고 정식 강사가 되어 긴 여행은 불가한 상황이 되었다.

2009년에는 제주도를 일주하고

2011년에는 경주, 남해, 사천, 고성, 통영

2013년에는 정선, 영월(동강), 섬진강 자전거길을 완주했다.


엄청 많이 다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입시학원 강사라는 직업을 가진 상황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놀았다. 1년에 한두 번 가능한 여행을 위해 남은 시간 내내 준비하고 상상하며 행복했다.


그러다 30대 후반 큰 변화가 있었다. 클라이밍을 하다가 회전근과 손목 삼각연골이 파열되고,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가 끊어져 이식수술을 했다. 고민 끝에 2015년을 끝으로 학원강사도 관뒀다. 몸을 쓰는 일도 점점 쉽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이 큰 문제였다.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고, 조금씩 체념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커졌다.


과거와 비교하지 말고 가능한 즐거움을 찾을 것


과거에는 되던 일이 이제 되지 않는데서 오는 우울감이 컸던 것 같다. 그래도 재활운동을 하며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등산을 다니고, 수영을 배우며 몸 상태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다시 자전거여행을 떠나기까지 3~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또 무릎을 다쳤다.

이번에는 반월상연골판이 상했다. 우리 몸은 뼈, 연골, 근육, 인대, 힘줄 등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구나. 이래서 AI로 인간의 뇌는 흉내 내도 물리적 육체 활동 구현은 더디기만 한 거구나. 몸이 아파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또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 말자.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말자.


부상 이후로 나는 여행 방식을 바꿨다. 굳이 목적지까지 가려하지 말자. 무리해서 많이 가려하지 말자. 그냥 즐기면서 천천히 가자. 중간에 힘들면 그냥 어디 숙소 잡고 동네 마실이나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자. 오르막이 있는 코스는 최대한 지양하고, 어쩔 수 없을 땐 그냥 끌고 가자. 천천히, 천천히, 시골 노파의 마음으로 가자. 주변도 보고, 사진도 찍고, 맛난 것도 많이 먹으면서 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또 되더라. 그래서 다시 해마다 한 두 번씩 자전거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섬진강 자전거길, 북한강 자전거길

2019년 동해안 자전거길(일부)

2021년 동해안 자전거길(일부), 낙동강 자전거길(일부)

2022년 오송-금강 자전거길, 섬진강 자전거길

2023년 제주도 일주, 남한강 자전거길

2024년 익산, 전주, 김제


마음을 바꾸니 또 다른 여행이 가능해졌다.
언제나 떠날 생각을 하면 즐겁고, 떠나면 돌아올 곳이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좀 있으면 대만 자전거여행을 간다. 십몇 년 만의 해외 자전거여행이다. 오랜만에 웹서핑을 하며 여행계획을 짜고 행복해한다. 그때보다 많은 것이 좋아졌다. 자전거 여행 인프라도 많이 좋아졌고, 정보는 넘쳐난다. 무섭기도 하다. 무엇보다 몸이 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대만 자전거여행 관련 유튜브를 틀어 놓고 일을 하다 예전 행복했던 기분이 살아나 갑자기 글까지 쓰게 됐다. 자전거용품도 몇 개 질렀다. 즐겁다. 그래 이렇게 또 몇 번이고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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