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물건은 거침없이 버리는 편이다. 첫째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쟁여둘 만큼 공간이 넉넉한 집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첫째로부터 비롯된 습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나간 과거에 별로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이 가사를 들을 때마다 비문이 아닌가 싶어서 감상이 깨진다. 가사 '그런'의 지시대상이 없다는 생각에 자꾸만 뭔 말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그냥 세월이 흐르고, 저 노래를 자꾸 듣다 보니 알듯 말 듯 크게 거부감이 없어졌다. 그저 그렇다는 뜻이면 어떻고, 또 그냥저냥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면 어떠냐. 그냥 가사가 그런 의미인가 보지.
지난 물건에 대한 감각이 딱 그 정도다. 버렸는지도 아닌지도 모를 물건이 궁금해지는 정도, 그러다 금방 귀찮아져서 찾지도 않고 다음날이면 잊어버리는 정도. 이 정도니 일단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면 대체로 버리게 된다, 큰 고민 없이.
오늘밤엔 잠이 오지 않아 잡생각이 많아졌는데 갑자기 20년도 더 된 편지가 생각났다.
남들보다 늦게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대 후반 내내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러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정서도 많이 안정되고 삶의 태도 같은 게 많이 바뀌었다. 약간은 평화주의자답게 말이다. 그때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도 몇 년이 지난 상태였고, 혼자 가게를 지키던 아빠는 어느 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그 혼란의 시기에 엄마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맨날 뻔했다. 이제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보통 이런 풍경, 그러니까 집은 힘들고 철없는 자식은 애써 대학 보내놨더니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상황에 아픈 엄마가 편지를 보내 구구절절 이러면 보통은 짠해지고 반성도 하고 그랬을 텐데 나는 도통 그런 감각이 없었다. 내용에 대해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하나도 맞지 않는 엄마의 글씨, 돈을 아끼려 그랬을 게 뻔한 누런 갱지, 질 나쁜 종이에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모나미 볼펜똥 이런 게 자꾸만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족 같은 거 삶의 본질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결혼할 생각도 없었지만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 보였다. 세상이 엄마나 아빠에게 조금만 덜 가혹했더라면 나는 맘 편히 조금 더 기분 내키는대로 살 수 있었을까?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면 나이 든 중년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고 미안해하던데 나는 그런 게 없다. 대신 엄마, 아빠의 삶이 너무 안타깝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다 괜찮은데 늘 세상에 주눅 들어 있고, 열심히 살면서도 언제나 죄인처럼 눈치를 보고, 단 하루도 쉬지 않는데 늘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았다. 이 모든 것은 세상 탓이고, 사회 탓이지 그들의 탓은 아니다. 허나 어쩌랴. 의지할 곳이 없다는데, 나는 그냥 외면을 못한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뒤로는 대체로 열심히 산 것 같다. 돈을 번지 얼추 20년. 단 한 달도 쉬어본 적이 없다. 휴직 개념도 없고, 이직 개념도 없다. 그냥 항상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여행도 전투적으로 다니고, 돈만 벌며 사는 인생이 아까워 틈만 나면 일을 벌이고, 책도 쓰고, 운동을 배우고, 뭔가를 도모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요즘은 진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학원강사가 싫지는 않다. 적성에도 잘 맞고 현재로서는 이만한 벌이를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언제까지 강사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라도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정말 관두고 싶을 때 관둘 수 있지 않을까? 강사로서 충분히 현재를 즐기고 있으나, 아무래도 너무 심적 압박이 강한 직업이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 입시강사로 살아간다는 건 광적인 풍경의 일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나 자신은 언제나 일정한 분열상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은 한 번 사는 인생 삶의 의미를 자기 합리화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충분히 현재 상태를 존중하면서도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 할 필요를 자주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