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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Feb 16. 2023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울면서 침 흘리는 드라마?

1.

왓챠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가끔 좋은 작품이 나와도 전혀 화제가 되지 않는다. 좋좋소는 너무 다큐 같아 힘들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최근 나온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김서형(다정), 한석규(창욱)가 부부로 나오는데 암투병과 음식을 엮어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말기 대장암 선고를 받은 다정은 남편 창욱을 찾아가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을 해주면서 병간호를 해달라 부탁하고, 한때 이혼까지 합의했던 부부는 부인의 암선고를 계기로 다시 한집 살림을 시작한다. 엄마와 함께 살던 아들은 갑자기 다시 들어온 아빠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라면 말고 요리를 해본 적 없다던 창욱은 다정에게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점점 요리에 익숙해진다. 레시피를 까먹지 않기 위해 쓰기 시작했던 요리 블로그가 책이 되어 나왔다. 동명의 에세이는 책으로, 그 책은 다시 드라마가 되었다.


드라마의 여운이 강해 책도 사 읽었다. 책에 나온 멘트는 약간의 가공만 거친 채 대부분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으로 그대로 쓰였다.


2.

요즘은 뭘 봐도 대충 본다. OTT 서비스가 일상화되고 많이들 그러지 싶다. 오프닝도 건너뛰고 클로징은 다 올라가기도 전에 화면이 넘어간다. 내버려 두어도 다음 회차로 넘어가고, 보다가 귀찮으면 멈춰도 상관없다. 다시 어플을 열면 멈춘 시점부터 재생이 되니 마치 책갈피를 꽂아 두고 책을 읽듯 영화 한 편도 조각조각 찢어 본다. 그만큼 작품을 통해 스며드는 생각이나 감정도 여기저기 찢어져 깊이 없이 파편적인 느낌만 남게 된다. 영상 콘텐츠는 너무 흔해서 차고 넘치고, 주위에서 야 요즘은 이게 재밌던데라고 말한 지 몇 달만 지나도 유행이 지나 있다. 여기저기 기록을 해놔도 잠시 뿐 나중에 보려 하면 막상 딱 이거다 싶은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대부분 틀어 놓고 딴 일을 한다. 스마트 tv로는 아무거나 틀어놓고 데스크톱 컴퓨터로 작업을 한다. 아니 일을 한답시고 앉아서 딴짓을 할 때가 더 많다. 한국어로 된 콘텐츠라면 눈조차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냥 배경음처럼 일단 틀어놓고 본다. 중간중간 듣다가 솔깃하면 화면에 눈길 몇 번 준다. 조금 집중해서는 안 되겠다 싶으면 그제야 각 잡고 소파에 앉아 시청한다. 그러다 시큰둥해지면 또 컴퓨터 앞에 앉는다. 매일 같이 오르내리는 주식처럼 이 몇 단계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꾸준히 괜찮을 때 드물게 엔딩을 보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대부분 중간에서 멈춘다. 본방 사수조차도 너무 오래된 일 같다.  


3.

무거움과 잔잔함의 거리를 이렇게 잘 유지한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다. 자주 울게 되지만 차분해진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씩 올라온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요리에도 에너지를 써보고 싶지만 그 정도 에너지는 없다. 요즘 트렌드가 전혀 아닌데 책을 드라마로 옮기고, 텍스트를 그대로 내레이션으로 따오는 그 고집스러움이 고맙다. OST를 부른 정밀아 목소리도 반갑다. 드라마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목소리다.


정밀아, 그런 밤들


아주 드물게 후반부는 대부분 소파에 앉아 집중해서 봤다. 대충 보아 넘긴 앞부분이 아쉬워 처음부터 다시 한번 봤다. 그제야 전체적인 맥락이 다 보이기 시작했다. 이혼을 앞두고 암에 걸린 김서형이 간병을 부탁한다. 당신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로. 간병을 시작할 때 사랑해서는 아니라고 말했던 한석규는 김서형이 떠난 후 자신이 사랑해서 간병을 수락했다 말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걸 제대로 몰랐다고. 이제야 자기 맘을 알았다고. 두 번을 보고 나니 결국 사랑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이야기다. 사랑은 변덕스럽다. 한때 좋아 죽던 사랑도 어느새 시들해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큰둥해진다. 일상은 조금씩 다른 일상으로 대체되고, 굳이 상대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상대가 있어 일상이 피곤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언제나 나로 충분한 세상과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만 충족되는 세상이 경합한다. 시큰둥해진 사랑은 급격하게 끝이날 수도 있고, 지지부진 이어질 수도 있다. 드물게 다시 불꽃이 일어날 수도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상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다시 알게 된다면. 


서로의 곁과 끝을 지켜주고 싶은 두 사람. 내 아픔에 힘겨운 와중에도 상대의 아픔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내 사랑에 조급한 와중에도 상대의 속도를 배려할 줄 아는 이 둘의 관계는 부부든 아니든 상관없이 비혼주의자인 내게도 큰 울림을 줬다. '인생이 끝을 향해 가는 순간, 우리는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이 며칠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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