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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실연필 Jan 01. 2022

완두콩 공주님(2편)

https://brunch.co.kr/@kyo3334/22


완두콩 공주님의 까탈레나처럼 베베 꼬인 심사는 으슥한 밤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마치 수학 정석이 아니라 실력 정석으로 업그레이드되는 형국이다. 이번 화에 소개할 공주의 예민 카테고리는 '빛'이다. 빛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 이토록 다채로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공주를 통해 배웠다.


일단 전등 스위치를 탁 누르고 불이 탁 켜지면 이 불이 그냥 형광등인지, LED 형광등인지의 여부가 공주님 안구의 평안함과 직결된다. 이사 온 집의 조명이 자꾸 꺼져서 LED 등으로 교체했는데, 그때부터 공주님의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는 '형광등을 피하고 싶어서'가 되었다.


일단 LED가 너무 밝은 게 문제였고(나는 너무 괜찮던), 빛이 둥글지 못하고 직선으로 쏘는 게 싫으며(빛이 쏜다는 건 어떤 걸까),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은 생활에 심각한 불편 초래하고(난 환해서 좋기만 하고만), 애들 시력에도 좋지 않다(어두운 방에서 책 읽다 큰 애는 안경을 쓰게 됐다는 엄연한 진실)는 주장이 연일 이어졌다.

비싼 돈 주고 업체 불러서 전기공사를 했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면 100% 이불을 대령해도 공주의 원성은 날로 높아져갔다.


결국 이 소란은 종결되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모든 방의 LED 등을 열고 A4용지를 두장씩 까는 것으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라고 쓰고 공주 마음대로 이리 했다고 읽어주길 바란다.)


빛에 대한 공주의 기민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등 스위치 옆에 위치한 보일러 컨트롤러. 이번엔 그게 문제였다. 잠들기 직전, 동서남북으로 한 점의 빛도 허용할 수 없는 공주의 시신경은 보일러 컨트롤러의 0.1mm 빨간빛을 참지 못했다. 나로서는 뭐가 어디에 빨간 점이 보인다는 건지 도대체 찾을 수도 없는 빛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기 눈알만 한 빨간 점이 보이긴 다. 빛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미세한 빨간 점. 그 점을 멀리서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도저히 잘 수 없다고 하는 그는 완두콩 공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결국 이 소란도 종결되었다. 이번에도 해결사는 종이. 노란 포스트잇을 잘라서 그 위를 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쯤 되면 뭐,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했겠지만 공주 머리맡 커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암막이다.

완두콩 공주는 확실하게 자기의 세계를 구축할 줄 알았다.


게다가 공주는 영리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카톡 프로필에 나와 찍은 사진을 올리고 '완두콩 공주님'이라 쓰는 바람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사는 여자가 참 별나구나 하는 얼토당토한 추측에 빠졌다. 그가 바로 완두콩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역시 '완두콩 공주'가 본인이 아니라 나라고 우기는 데 있었다.


그는 내가 세상에 다시없을 별스러움과 특이함과 엉뚱함과 예민함과 똘끼로 똘똘 뭉친 외계인 같은 애라고 했다.


심심하면 물었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난 말했다. 응 안드로메다 은하계.


지난 완두콩 공주님 1편의 끝을 '아유 이 웬수야'로 맺었다. 웬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옛 말이 있다. 확실히 조상님들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러니 이번에도 롱롱 타임 어고.

나와 완두콩 공주는 진짜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한남동 할리 데이비슨 매장 앞 육교 위였다. 화려한 명품 매장과 대사관이 즐비한 한남동과 이태원 가는 길 위에 시골에서 막 상경한 가난하고 촌스러운 두 아이가 서 있었다.


삶의 나침반도, 주사위도 하나 없이. 믿을 거라곤 공부하던 손과 아직 어린 나이뿐이던 우리는 세상 속에 이름 하나 없는 무명의 아이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공적인 이름을 갖고, 주민등록등본에서 이름과 주소를 함께 확인하며, 세상에 없던 새로운 영혼의 아이들을 부모의 이름으로 만나기까지 우리는 함께 성장했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매일같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전우처럼, 서로의 별남과 까칠을 인내하며 앞으로도 함께 늙어갈 인생의 동지이자 웬수.


그는 바로 나의 친애하는 완두콩 공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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