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인의 중앙아시아 여행기. 4
송쿨 호수에서 죽과 샐러드, 빵과 잼, 과일로 식사를 마친 후 협곡 트레킹을 나선다.
우리 일행은 리더인 윤 선생님을 필두로 사업을 하시는 이 사장님, 국영기업체에서 정년퇴직한 신 사장님, 교사로서 퇴직한 조 선생님과 이 선생님 그리고 조 여사님과 현지 가이드인 아이잣과 이 교수 그리고 나까지 아홉 명이다. 차 안에서 서로의 소개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아직은 서먹한 사이다. 일행 중 대다수는 윤 선생님의 지인분이다.
고지대여서인지 아니면 건조한 기후 때문인지 키르기스스탄의 산과 들에는 큰 나무들을 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바위산 몇몇 곳을 빼고는 완만한 능선의 산들은 나무로 빽빽하다. 그래선지 여름에는 이 산이나 저 산이나 비슷한 형상이고 색감이다. 그런데 이곳의 산들은 나무와 숲이 없어서인지 알몸 그대로를 내보인다. 날카로운 바위의 모습, 풍화되어 주름진 계곡들, 맨살의 색감까지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이 산과 저 산이 다르고 그렇기에 모든 산마다 제각각의 아름다운 모습과 색깔을 지니고 있다.
차창 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과 평원의 모습에 취하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다. 우리는 잠시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현지인들로 붐비는 휴게소의 메뉴는 뷔페식이다. 이곳에서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선을 먹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구이였다. 바다가 없는 나라에서 먹은 고등어는 아이잣의 말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 생선은 귀하다. 그렇기에 생선요리는 고급 요리로 대우받는다. 별로 맛도 없을 것 같은 송어가 귀한 재료로 대우받는 곳이 중앙아시아다.
가는 길목에 자리한 라예오니(Paйohy) 지역의 협곡(Konorchek)을 둘러보았다. 작은 냇물이 있는 이 계곡은 그리 깊지 않았고 험하지도 않아 산책하기에 좋았다. 능선을 따라 피어난 들꽃과 야생 파꽃을 신기해하며 계곡을 따라 걸었다. 관광객은 거의 없었고 현지인들 몇몇만 가끔 마주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협곡 바닥의 황토가 진득하게 신발에 달라붙는다. 가끔 천둥 번개까지 동원된 빗줄기 때문에 우리의 트레킹은 초입새만 접어든 뒤, 짧은 시간 만에 중단되었다. 사진으로 보면 침식과 풍화된 황톳빛 산과 계곡이 멋있는 곳인데…
비는 우리가 계곡에서 돌아온 이후 금세 그쳤다. 잠깐의 비였는데도 계곡물이 불어났다. 아마 조금만 더 내렸다면 계곡을 따라서 내려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신발과 옷에 묻은 흙을 대강 털어내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자 비는 금세 그치고 고개를 하나 넘자 푸른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일정은 총 케민 계곡 주변을 트레킹 하는 것이었지만, 비에 젖은 상태라서 게스트하우스로 곧장 가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강물을 따라 형성된 넓은 초지를 지나자 물이 풍부한 탓인지 삼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산들도 보인다. 벌판을 가로질러 다리를 건너자 산 아래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도 보인다. 포플러가 도열해 있는 길을 따라 오르자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둘 눈에 띈다. 인근에 국립공원이 자리한 탓에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한적하기만 한 시골 마을이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산 아래 능선에 있다. 비가 온 탓에 벤츠 소형버스는 오를 수 없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매니저인듯한 남자가 사륜구동 SUV를 몰고 왔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SUV에 나누어 타고서 숙소에 도착했다. 산 아래 구릉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는 비교적 깨끗했다. 평소에는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3대가 사는 곳인 것 같다. 집 앞에는 유르트도 한 채 있고, 작은 정자와 들마루까지 있다.
이 교수와 내가 1층 창문이 있는 방에 여장을 풀었다. 재킷은 방수이기에 그런대로 깨끗했지만, 청바지와 트레킹화는 진흙 때문에 엉망이다. 샤워 후 몇 가지 옷과 신발을 빨아서 밖에 널었다. 속옷 셋, 양말 세 켤레, 바지 셋, 티셔츠 서넛으로 준비해왔기에 숙소에 도착하면 늘 몇 가지 빨래는 필수다.
저녁을 먹기 전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 마리의 강아지가 따라나선다. 삼나무가 우거진 계곡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집 뒤의 능선에는 역시나 들꽃의 세상이다. 구글렌즈로 검색해본 세이지, 치커리, 노블야로우, 밀크씨슬까지 한창이다. 나를 따라나선 두 마리의 강아지는 그레이하운드와 콜리를 닮은 듯한 모습인데 ‘타이간’이라는 중앙아시아의 토착 사냥개라고 한다. 어미는 흰색인데 코끝과 배만 흰색인 검둥이들이 참 귀엽다. 넓은 풀밭을 마음껏 뛰어노는 그들이야말로 ‘오뉴월에 개 팔자’란 우리네 속담에 걸맞은 신세다.
저녁 7시 무렵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했다. 빵과 잼, 꿀 그리고 당근, 오이, 가지로 만든 샐러드와 볶음밥이 주메뉴이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었다. 저녁 이후 어둑해진 밤, 윤 선생님이 부탁해서 준비한 맥주를 마시며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이 오가고 그러는 사이 밤은 깊어만 갔다.
4일 차, 오늘의 원래 일정은 부라나에 들렀다가 스카즈카 협곡에서 트레킹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를 비롯한 몇몇 일행의 요구로 이식쿨 호수에 갔다가 부라나로 이동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환승 대기소에서 우리는 우연히 한국 주재 키르기스스탄 대사를 만났었다. 중년 여성인 대사는 우리에게 꼭 이식쿨을 보라고 권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교수는 이식쿨을 꼭 보고 싶다고 했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이식쿨은 바닥에서 미네랄 함유량이 높은 뜨거운 물이 솟아나기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린 약간의 소금기를 머금고 있는 호수의 크기는 제주도의 3.5 배이며 둘레만 400km가 되는 이른바 바다 같은 호수다.
‘천산의 진주’라고 불리는 해발 1,600m에 있는 이 호수에서 수영하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현지인들은 믿는다고 한다. 내륙 한가운데 자리한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에게 이식쿨은 어쩌면 바다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늘 보고 접하는 것이 산이다 보니 이식쿨처럼 널따란 호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 인지도 모른다.
이 교수, 신 사장, 이 사장, 셋은 이식쿨 호수로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서인지 한참을 들어갔음에도 마치 서해안의 해수욕장에서처럼 그리 깊지 않은가 보다. 멀리 들어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이식쿨 호숫가 모래사장에서 산책한다. 넓은 호숫가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가족 단위로 피서를 나온 듯한 현지인들만 간간이 보인다. 사실 출국 이전에 수영복을 지참하라는 전언도 받았다. 그러나 거의 매일 수영을 해온 나로서는 이국에서도 수영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행위 같아서 수영복은 챙기지 않았다.
바다처럼 워낙 큰 호수라서 어디에서 보는가에 따라 경치가 다를 것이다. 우리 일행이 갔던 발릭치 근처의 이식쿨 호숫가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다. 마치 한국 서해안의 일부를 보는 것처럼… 사진으로 보면 스카즈카 협곡도 대단하다. 황금색 언덕과 온통 붉은 능선이 어우러진 침식된 지형은 지구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닐 것이다. 원색의 대지를 따라 언덕에 오르면 푸른 이식쿨 호수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붉은 대지와 능선 너머의 푸르고 청정한 이식쿨을 바라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바꾼다. 다음의 여행을 위해 몇 개의 명소는 남겨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식쿨 호수에서 한 시간 정도 이동해서 고대 도시 부라나(Burana)에 닿았다. 밀밭이 펼쳐진 벌판 한가운데 붉은색 탑만이 홀로 우뚝 선 이곳은 10세기경에 카라한조의 수도였다고 하며 그때 명칭은 발라사군이라고 한다. 13세기에는 칭기즈칸에게 정복되었으며 15세기쯤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다.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탑과 작은 언덕뿐이다. 우리는 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철제 계단을 밟고 탑의 입구까지 올라갔다. 원래 발라사군은 두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고 한다. 유적지에서는 요새, 상점, 시장, 목욕탕, 상수도 시설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터는 이제 흔적조차 없다. 다만 근처에 작은 언덕이 있다. 언덕은 왕궁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는 투르크 유목민들의 묘비이자 죽은 자들의 작은 석상이라는 ‘발발’들이 여기저기 서 있을 뿐이다.
나는 홀로 탑에서 내려와 자그마한 박물관으로 걸어갔다. 박물관 앞에 이르자 중년의 여성이 문을 열어주었다. 전시관 내부의 중앙에는 시인이자 <쿠타드구 빌리그 Kutadgu Biligs>의 저자인 ‘하지드 유수프 발라수군(Hajid Jusup Balasagyn)’의 반신상이 놓여 있고 유적지에서 출토된 항아리, 청동거울, 청동 장신구 및 암각화가 새겨진 돌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드 유수프 발라수군은 키르기스스탄의 1000 솜 짜리 지폐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니 이곳에서는 꽤 유명한 시인인 것 같다.
박물관에서 나와 혼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미나렛으로 간주되는 부라나 탑은 원래 45미터의 높이였지만 15세기에 발생한 지진으로 기단부만 남아서 25미터라고 한다. 조금 먼 곳에서 바라보는 탑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탑과 발발 그리고 왕궁터라고 추정하는 작은 언덕만이 과거 왕국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시 입구를 나서서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 위에서 넓은 들판을 바라본다. 연분홍의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있는 둑을 따라 황금빛 밀밭만이 넓게 펼쳐진 평원 위의 옛 유적지… 무너진 탑과 돌들만이 증거 하는 사라진 도시와 사람들을 잠시 상상 속에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