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인의 중앙아시아 여행기. 5
1. 오쉬 슐레이만 산에서 미끄럼을
오늘은 비슈케크를 떠나 오쉬(Osh)로 이동한다. 오쉬는 그 유래가 3천 년이나 되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다. 오래전에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로 붐볐던 곳이다. 오쉬로 가는 원래 일정은 시외버스를 타고 10시간 이동하는 것이었으나 아이잣이 현지인 가격으로 싸게 항공권을 구입하여 편안하게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이 교수와 나를 포함하여 5명이다. 이 사장님은 오늘 홀로 귀국하고 윤 선생님은 조 선생님과 비슈케크에 있다가 며칠 뒤 합류하기로 하였다.
코녹(Konok) 호스텔에 여장을 풀고 현지 한국인 음식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삼겹살과 보드카 그리고 개인별 메뉴에 커피까지 인당 2만 원 정도로 만찬을 즐겼다. 오랜만에 마시는 보드카에 취기가 오른다. 현지 한국인 식당에서 내가 주문한 것은 비빔밥이었다. 이 교수는 김치찌개를 신 사장과 아이잣은 라면을 시켰다. 음식의 맛과 가격은 한국의 식당과 비교해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음식점에는 한국인보다는 현지인들이 많다. 이곳에서도 K-문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키르기스 사람들은 한국을 이야기할 때 드라마 <주몽>을 많이 화제로 올린다. 스토리 속 인물들의 이름까지 꿰차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는 <대장금> 이후 <주몽>이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생각해보면 드라마 <주몽>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부여”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와 가깝다. 또한 유목을 중시하는 문화적 배경도 어떤 면에서는 유사할는지도 모른다. 이란에서도 이 드라마가 2008~2009년에 국민 드라마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15~6년 전에 방영된 한국의 드라마가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사랑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점심과 커피로 여유를 즐긴 탓일까? 하루가 참 빨리도 지난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어 뜨겁던 햇볕이 조금은 사그라질 때 우리는 시내 한가운데 있는 슐레이만 산으로 향했다.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이 산은 높지 않지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고 있다. 이곳은 불교의 흔적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원을 비롯해 많은 예배 장소, 신단, 성소 등이 있다고 한다. 슐레이만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신성시하는 솔로몬의 또 다른 발음이며 그와 관련된 설화가 깃들어 있다. 이 산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여 요통, 두통, 불임 등의 환자들이 쾌유를 기도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천천히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석양이 질 무렵이 경치가 좋다고 하여 이 시간대를 택한 것이다. 산에 이르는 길은 포장된 평탄한 도로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단단한 바윗길이 연속된다. 많은 사람의 발길에 의해 닳아진 돌들은 반들반들하다. 붉고 푸른 무늬가 감도는 닳아진 길, 산 전체가 커다란 한 덩어리의 대리석 같다.
오르는 길에 잠시 만난 소녀들이 한국인이라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젊고 잘생긴 청년도 아닌 늙은 아저씨라도 한국인인 것이 반가운 모양이다. 여기서도 k-문화의 덕을 본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는 동굴의 기도처와 요통을 낫게 한다는 미끄럼틀 모양의 바위에 닿았다. 늘 활력이 넘치는 이 교수는 기어이 동굴 속으로 휴대전화의 랜턴을 켜고 들어간다. 나는 입구만 둘러보고 물러났다. 좁은 입구를 지나면 몇몇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현지인들 여럿이 기도를 마쳤는지 입구로 나온다. 잠시 후 이 교수도 돌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미끄럼 타는 바위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났는지 반들반들하다. 허리가 불편한 나 역시 이곳에서 수십 년 만에 미끄럼을 탄다. 중년의 현지인 아주머니가 말하길 세 번을 타야 허리가 고쳐진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두 번이나 더 바위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그래선지 중앙아시아 여행 중에 허리 통증을 느낀 적이 없다. 출국 한 달 전, 테니스를 하다가 삐끗해서 통증이 다리까지 번져 CT 찍으랴, 재활 운동하랴, 여간 신경을 쓴 것이 아닌데…
슐레이만 산 정상에서 오쉬 시내를 조망한다.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도시인 오쉬는 해발 1,000미터에 있으며 첫인상은 비교적 깨끗하다. 수천 년 동안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교차로 역할은 한 이 도시는 며칠간 우리가 묶었던 비슈케크보다도 깔끔한 느낌이다.
구름이 노니는 천산산맥 아래 구릉과 평야가 펼쳐지고 산을 중심으로 나무와 건물들이 올망졸망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까이 모스크와 학교, 아이잣이 다녔다는 오쉬 주립대학교 캠퍼스의 붉은색 건물도 보인다. 산길을 내려오자 어둠이 짙어진다. 도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2. 오쉬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첫날
오쉬에서 숙소는 시내의 한적한 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5인실인데 3명이 쓰기로 했다. 값을 따져보니 우리 돈 1만 원도 안 된다. 다만 조식은 따로 해결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여행을 했지만 사실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다. 호텔이나 아파트에서 숙박을 해결한 것은 내가 잠자리를 가리기 때문은 아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피곤하거나 술을 많이 마시면 이를 가는 버릇이 있기에 다른 사람과 같이 숙박하는 것을 꺼렸다. 이번 여행은 치과에서 비싸게 주고 맞춘 마우스피스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늘 같은 방을 쓴 이 교수에 의하면 마우스피스를 착용하고 잘 때는 조용하다고 하니 다행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술에 많이 취하면 밤에 등장하는 이 불청객은 어쩌면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삭이려는 나의 성격 탓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온전한 배낭여행이라면 혼자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보다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다. 게스트하우스는 값도 싸지만, 동행자를 만날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며 외로움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층 침대가 놓인 한적한 곳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고 공용욕실은 물 빠짐이 불량이다. 그래도 어쩌랴 값이 그런데… 피곤하기에 곧바로 잠을 청했지만 두 시간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별 불편함 없이 잠을 깊이 잔 뒤, 아침은 인근 빵 가게에서 산 햄버거 같기도 하고 크루아상 같기도 한 이름 모를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빵집을 나와 온통 부풀어 오른 입술을 위해 약국에 들러 항바이러스제 연고를 40 솜(640원)에 구입했다. 구글렌즈로 사용설명서를 대략 번역해보니 항바이러스 연고는 맞다. 그런데 제조처는 러시아다. ‘러시아면 어쩌랴 잘 듣기만 하면 그만이지…’하며 여기저기 심하게 부푼 입술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사실 약국에서 산 것은 연고뿐만이 아니다. 의사전달이 충분하지 못해 약사(?)가 처음 들고 왔던 립글로스와 구강청정제도 같이 샀다. 그러나 건조하기에 필요할 거라던 립글로스는 여행 내내 필수요건은 아니었다.
3. 파미르 고원으로 향하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레닌 봉 국립공원(레닌 피크 내셔널 파크)은 오쉬에서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일행이 여섯 명이라고 7인승 SUV 한 대가 왔다. 짐도 만만치 않은데 이건 아니다. 운전기사에게 한 대 더 부르라고 하자 이십 분 뒤에 차가 왔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 같으면 벌써 폐차되었을 아주 낡은 SUV였다.
낡은 지프로 파미르의 아득한 고갯길을 넘는다. 치이르치크 고개(Chyiyrchyk Pass)로부터 시작된 고산지대로의 행로, 고개를 넘으면 다시 평원, 평원을 지나면 다시 고개로 길은 이어진다. 키졸 쿠르간(Kizöl-kurgan)을 지나자 평원이 있고 이 높은 곳을 흐르는 강물이 있다. 산은 생김새, 높이, 색감이 제각기 다르다. 오랜 세월 속에 풍화와 침식이 된 그 모습마다 낯설다. 앞을 보아도, 뒤돌아보아도, 가까이에서도, 멀리에서도 절경이다.
키치 카라콜(Kichi-Karakol) 근처를 지나 조금 더 가자 풍경은 더욱더 감동적이다. 고지대임에도 붉은 바위산 아래 펼쳐진 유채꽃의 향연은 아마 ‘인생의 풍경’이 될듯하다. 더 지나자 모든 가식은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산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한 그루 나무도 보이지 않는 바위산, 세월의 주름을 보여주는 황톳빛 산, 작은 관목과 풀이 덮고 있는 잿빛 산을 지나친다.
우윳빛 강물이 지나는 곳에는 푸른 나무와 초원들이 자라나고 키 큰 백양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곳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있다. 황토벽과 돌로 담장을 두른 집 주위에는 가축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나무 울타리가 처져 있고 그 안에는 살구나무가 진홍빛 열매를 매달고 있다. 한쪽 텃밭에는 감자와 야채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도 보인다.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차에서는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난다. 그나마 창문을 열어놓아서 다행이다. 가끔 서늘한 바람이 산과 숲과 흙의 내음을 배달해준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길에서 염소와 말, 소떼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도로를 유유히 활보하는 그들의 모습이 느긋한 유목민들의 마음을 닮은 것도 같다.
지난겨울의 폭설과 만년설이 열어놓은 냇물은 나무와 풀을 키워내고 들판을 적셔 초원 위의 말, 소, 양, 야크 떼를 배부르게 한다. 우리가 파미르 길옆 식당에서 점심으로 먹은 고깃국과 감자도 설산의 물과 고원의 햇볕이 차려준 성찬일 것이다.
소피 쿠르간(Sofi-kurgan)을 지나 우리는 사리 타쉬(Sary-Tash)의 작은 카페 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만두와 비슷한 삼사 그리고 소고기와 감자를 넣어 끓인 수프와 빵, 토마토와 오이의 샐러드이지만 시장해서인지 맛이 좋다. 오지의 식당인데 주인장인듯한 젊은 여성의 영어 구사 능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 잠시 화장실에 들르는 동안 훌라후프를 하는 어린아이들을 만나서 서로 깔깔 웃어대다가 마을 앞에서 몇 장의 사진으로 추억을 남긴다. 유명한 명소도 아닌 것 같은데 설산을 배경으로 한 경치가 뛰어나다. 언젠가 여유 있게 이 지역을 방문한다면 이곳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묵어도 좋을 것 같다.
사리 타쉬에서 한 시간쯤 와서 사리 모굴(Sary Mogul)에 도착했다. 고개를 넘고 넘어 도착한 사리 모굴은 넓게 평원이 펼쳐져 있고 마을은 그 가운데 놓여 있다. 마침 장이 열려서 우리는 잠시 시골 장터인 그곳을 구경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수십 년은 된 듯한 소형 승용차인 낡은 티코였다. 차가 시동이 걸릴지 궁금하다. 장터에서는 곡물, 과일, 옷, 생활필수품 등을 팔고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과일만 조금 사고 다시 레닌 봉우리(Lenin Peak)를 향하여 출발했다.
천산산맥의 높은 산 중 하나인 레닌 봉은 그 높이가 7,134미터이며 평지로 여겨지는 해발 3,000미터에서 출발해 3,700미터에 닿으면 산장이 있고 그곳에서 4,400미터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시간과 체력이 베이스캠프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탄 SUV는 평원을 지나자 잠시 말썽을 부린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산등선으로 접어든다. 좀 더 오르자 하얀 천으로 히잡을 두른 듯한 설산들이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구릉지대로 접어들자 붉은 봉우리와 호수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호수 곁에는 여러 채의 유르트도 보인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베이스캠프로 오르기로 한다.
컨테이너 하우스인 휴게소 밖으로 나오자, 고도 3천 7백 미터의 바람이 거세다. 한여름인데도 잠깐씩 눈발이 날리기도 한다. 호숫가를 거닐다가 이 교수, 신 사장과 함께 베이스캠프 쪽으로 오른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천천히 언덕을 오른다. 비교적 평탄한 구릉만을 한 시간쯤 오르다가 나만 다시 돌아왔다. 고산증세는 없지만 출국 전 코로나 감염 후유증, 허리 부상으로 몸 관리를 못 한 탓으로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체력을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이 교수도 날씨 탓인지 중간에서 돌아온다.
레닌 봉의 산장에서 되돌아와서 사리 모굴에 있는 압두마릭(Abdumalik) 홈스테이에 도착했다. 현지 숙소인 그곳은 마당에 서면 설산이 훤히 보인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소진되어 설산에 노을이 지는 정경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일은 해뜨기 전에 일어나야지 생각하며 파미르의 고산지대에서 뒤늦게 잠을 청해 본다.
지난밤늦게 잠들었지만, 일찍 눈이 깨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잠시 열고 나왔다. 아직 미명의 시간, 해가 뜨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곤하게 자는 이 교수를 깨웠다.
해발 삼천의 고원의 대지는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여름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며칠 전부터 엉망이 된 입술, 따스하게 잠들지 못한 탓에 굳어진 근육으로 대문을 나선다. 뒤늦게 출발한 이 교수는 갑자기 흥분한 모습으로 설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설산을 향해 걸어간다.
자갈이 깔린 길 곁에는 냇물이 흐르고 푸른 초원 위에 연이어 도열한 황토벽과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 그 건너 평원과 언덕이 길게 펼쳐지고 그 너머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을 건너면 다시 구릉지대가 이어지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눈이 없는 비교적 낮은 봉우리 뒤에는 온통 만년설이 가득한 설산의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진다.
눈 덮인 각진 봉우리들은 아침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옆 봉우리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개 들어 보면 설산 위에는 몇 포기의 작은 구름 조각만이 보이고 먼지와 안개가 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이 펼쳐진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말을 잃고 마치 취한 듯 설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설산 아래까지는 걸어서 닿을 수 없는 거리이지만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욕망으로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설산은 햇살을 받아 연분홍의 색감으로 물들고 있다. 붉은 색감이 감도는 산 위 하늘에서 아직 떠나지 못한 둥근 낮달의 흰 얼굴도 보인다.
강둑이 보이는 곳에서 나는 홀로 서서 아침 햇빛에 빛나는 설산을 바라보았다. 푸른 풀이 무성한 초지와 황톳빛 집들, 그 너머 구릉과 작은 봉우리, 설산과 하늘과 낮달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세계 속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에 빠졌다. 벌판을 지나는 전신주까지도 흠나지 않는 파미르 고원… 설산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가슴속에 무언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마 그것은 어쩌면 눈물일는지 모른다. 만년설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굳어있다가 이제야 녹아 흐르는 것, 그것은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감동의 물줄기일 것이다. 아름다움과 신비함의 경이로운 세계 앞에 서서 나는 비로소 감사함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나의 버킷리스트의 1순위는 히말라야 도보여행이었다. 여행보다는 설산을 보고 싶다는 것이 사실 우선순위였다. 만년설로 뒤덮인 까마득한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울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진주보다 값지다. 오래전 설산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부러웠다. 그들은 그 순간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도 해보았다. ‘나도 언제인가 설산 앞에서 울어보자’ 그것이 죽기 전 1순위의 삶의 목표였다.
수년 전부터 히말라야 도보여행을 실현하고자 히말라야 여행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고 시간 날 때마다 영상이나 정보도 검색하기도 하였다. 히말라야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장비도 구입하고 나름대로는 실현할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히말라야 트레킹 이전에 고산지대인 샹그릴라의 매리 설산 트레킹을 다녀오고 나서 가능하다면 랑탕 혹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아마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시도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현지에서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설산이 보이는 곳까지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설산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비한 자태의 설산 앞에서 인간 존재로서의 한계와 비소함을 깨닫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수십 년 전,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던 시간강사였다. 늘 불안정한 강사로서 빈한한 가족들, 불안한 미래, 모순의 현실과 늘 직면해야 했다. 그 시기에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라고 시 속에서 발언한 적 있었다. 그 구절을 보고 아내가 “혼자 히말라야에 가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라고 항변했었다. “그것은 시의 한 구절일 뿐이다.”라고 일축했지만, 그 당시에, 사실 나는 더럽고 무자비한 일상과 현실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장의 얼음이 되어 나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 길 위에서 쓰는 편지. 3
고원을 지나 강을 건너 나는 그대에게 간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왕릉 같은 작은 봉우리들을 넘어 깊고 깊은 계곡을 지나 그대에게 간다. 마침내 간다.
순백의 면포로 얼굴을 가린 신부처럼 그대는 있다. 까마득한 곳에 말없이 있다. 이마와 가슴에까지 쌓여 있는 눈은 이른 햇빛에 일순간 금빛으로 빛나고 황금빛 이마는 흰 눈 위에 긴 그림자를 각인하고 있다.
사막을 지나, 해발 삼천, 사천의 평원을 지나 구름이 내려앉은 산 능선을 올라 그대에게 간다. 가쁜 숨, 삐걱거리는 무릎으로 간다. 새들마저 보이지 않는 곳, 날 선 바람만이 거친 휘파람을 불고 있다.
가슴을 열어 세상을 껴안고 있는 그대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여울과 우윳빛 강물, 눈물이 열어놓은 산정호수는 고원의 풀과 관목을 키우고 낮은 평원 가득 들꽃을 풀어놓았다.
오래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제 흰 귀밑머리의 늙은 사내가 되어 그대에게 간다. 가슴속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감추고 간다. 말 없는 그대에게 말을 잊은 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