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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n 29. 2024

일기의 기능

혜이드가 씁니다

 혜킬은 아이패드에 일기를 쓴다. 요즘에는 매일 쓰진 않는다. 대개 삶이 힘겨울 때 쓰는 것 같다.


 2019년 말, 코로나가 터졌다. 당연히 적당한 호들갑과 함께 금방 과거가 될 사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는 예상보다 강력했고, 2020년은 재난 같은 해로 기억된다. 학교의 보호 아래 외국인 노동자로 일할 수 있는, 굉장히 기대하고 있던 이벤트가 코로나로 무기한 보류됐고, 복수 전공했던 패션 의류 기초 공부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실습을 해야 할 시기였지만 강의실에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웃기게도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각자 토르소 마네킹 하니씩을 이고 지고 집에 가야 했고, 밤새도록 녹화된 강의를 보면서 광목 드레이핑을 연습했다. 인생 처음으로 열심히 하고 싶은 운동이었던 발레는 연이은 휴강 공지와 인원 제한으로 흐지부지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오래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는 원래대로라면 휴가를 자주 나올 수 있는 공군으로 복무 중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그러지 못했고, 우리는 서로 예민해져 자주 싸웠다.


 2020년 말,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 지휘 책임자가 한 번 더 보류를 공지했고, 어영부영 인터넷 강의로 배운 의류 지식들은 금방 휘발됐다. 발레 덕분에 키운 근력과 유연성은 배우기 이전으로 돌아갔고,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꽤 오랜 시간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고작 1년 간이었지만, 집에 갇혀 무기력과 우울에 스스로를 담갔다. 꼭 해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하지 못했다.


 2021년 초, 명백한 20대 중후반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4학년 2학기의 삶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지난 6년 간 애매한 신분으로 마음대로 자유를 즐기며 "개미는 싫어~ 베짱이가 될 거야~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노래 부르던 나는 그 말이 그저 허세였다는 것을 난데없이 인정했다. 개미의 집에서 개미로 태어난 자가 느닷없이 베짱이로 변태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곧 부모와 학교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게으름과 무질서에 팅팅 불려진 현상태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삶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작은 성취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몇 가지 규칙을 정했고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매일 11시 이전에 일어나서 물 한 잔 마시고 밖에 나가 잠깐 걷는다.

2. 인스타 구경, 핸드폰 게임 시간을 줄인다.

3. 일주일에 2편 이상 장르 불문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긴다.

4. '왜 그랬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자꾸 생각하지 않는다.

5. 사건이 아닌 생각이나 감정 위주로 매일 일기를 쓴다.

(이 목록도 옛날 일기에서 찾아왔음)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름 구체적으로 대비했던 2021년은, 예상과 반대로 즐겁게 흘러갔다. 직업도, 경험도, 배움도, 사람도 다양하게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내 '엉망진창 상태'를 멋지게 여겨 지켜주려 노력한 이가 나타났다. 덕분에 규칙들은 흐지부지 지켜지지 않았다.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보다 되는대로 흐름에 맡기는 것이 본성에 부합했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에 따라 규칙들은 금방 잊어버렸다.


 그래도 5번, 일기 쓰기는 계속 가져갔다. 내 기억은 자주 왜곡되고 사라졌기 때문에 기록을 구체적이고 길게 남기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페이지가 쌓이자, 몇 달 전의 내가 궁금해졌고, 과거의 나에게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보증된 미래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혜파리들은 대부분 불안에 떨고 있다. 보통 사회와 타인을 포함한 외부 세계와의 갈등이 기록됐다. 그들에게는 미래일, 현재의 혜파리들이 과거의 혜파리들을 안심시키고 응원하고 위로하면서 대화를 한다. 즐겁게 신념을 키우고 자아를 형성하는데 꽤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 여기서도 약간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혜킬 앤 혜이드>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아 혜킬은 무의식 혜이드를 인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의 혜파리들에게 댓글을 단 것은 혜킬이었다. 나는 일기에서조차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혜킬은, 과거의 혜킬과 혜이드들에게 혜킬식 위로를 했다.


 자아 혜킬은 긍정적인 동시에 시니컬하다. 혜킬은 혜파리에게 일관적인 신념이나 논리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깊이 들어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탐구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자기모순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감정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려고 하다가도 스스로에게 오류가 생길까 봐 겁이 나 핸들을 휙 꺾어버리곤 무의식인 혜이드에게 그 모든 것들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아 X발,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신경 쓰지 마~'를 물씬 풍기는 류의 댓글을 달고 튀어버린다. 분명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X발'과 '좋은 게 좋은 거지'는 함께 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분노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고, 냉소적인 염세에 가까운 것 같다.


 혜킬이 혜파리를 지키기 위해 비슷한 일을 몇 개월 간격으로 반복했다. 그새 혜이드는 아무도 모르게 배제되고 배제되어 칼을 갈며 구석에 숨어 있다가, 혜파리의 정신과 체력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짜잔 등장해 폭발한다.


 그럼 다음 날, 혜킬이 돌아왔을 때 긍정적이면서 시니컬한 방식으로 혜이드의 행적에 대해 일기를 쓴다. 대개 혜이드를 감싸고 용서하는 투로 쓰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일기 쓰기 덕분에 쉽게 성찰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성찰이 자기세뇌로 이어져 해로울 때가 있었던 것 같다.


 혜킬은 성숙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성숙한 사람은, 모든 걸 포용하는 사람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세련되게 자신의 요구나 필요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타인과 부대껴야 한다. 혜킬이 노력했지만 노선이 살짝 틀렸음을 깨달았다. 혜킬은 모든 걸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신도 예수도 부처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좋은 사람'까지 되고 싶으니 진짜 속내를 외면하고 진짜 같은 가짜 신념의 방패 안에 숨어 간 보듯 살금살금 살았다. 일기에도 솔직해지지 못하고 자신을 속여가며. 그 대가로 혜이드가 격노했고 둘의 충돌에 혜파리가 상처 입었다. 흑흑.


 혜킬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혜파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우선 타인이고 뭐고 혜킬이 혜이드를 가두지 않는 연습을 하기로 한다. 서로 진짜 대화를 하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했고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일기는 혜이드가 쓴다.

2. 댓글은 혜킬, 혜이드 둘 다 쓴다.

3. 혜킬이 혜이드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4. '왜 그랬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생각이 들면 그냥 계속하게 둔다.

 *다만 3번을 전제할 시에만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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