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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n 25. 2024

혜킬 앤 혜이드

혜킬이 씁니다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지킬 버전과 하이드 버전으로 나눠서 살고 있다. 하이드 버전을 인정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아마도 사춘기 때부터 스무 살 초까지, 자아가 미약하던 시절에는 안과 밖 둘 다 적당히 물렁하고 적당히 단단했다. 언제든 누구에게라도 화가 나면 불같이 화를 냈고, 조금이라도 납득이 되는 포인트가 있으면 아무 말 못 하고 쿨한 척 타협했다. 지점토 인간이랄까. 꾹 누르면 수우우우우우욱 들어갔지만, 그래서 다시 조물조물 모양을 잡으면 원래대로 돌아오기가 쉬웠다. 쉽게 상처받았으나 쉽게 회복했다. 진짜 감정과 진짜 행동으로 살던 때였다. 진짜 분노, 진짜 슬픔, 진짜 부끄러움, 진짜 합리화, 진짜 믿음, 진짜 희망.


 그런데 점점 보고 듣는 게 많아지고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수록, 나는 용기 있게 맞설 수 있는 '강단'보다 약삭빠르게 상황을 판단해서 피해버리는 '눈치'를 먼저 키우게 되었다. 몬스터를 처치하고 퀘스트를 깨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RPG 게임의 기본은 각 캐릭터마다 유리한 스킬 트리를 먼저 찍는 것이다. 나도 본능적으로 나를 안전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눈치보기' 및 '회피하기' 스킬을 먼저 찍었다.


 그 와중에 개똥 철학자였던 나는 23살의 어느 날, 번개 같은 깨달음에 머리를 얻어맞고 긍정적 허무주의를 내면화했다. 여전히 긍정적 허무주의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때부터가 약간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때는 '긍정적'보다 '허무'에 좀 더 꽂혀있었거든.


 앞으로 쓸 일이 또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긍정'의 경험을 해본 일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뭐든 잘하긴 잘하는데 애매하게 잘했고, 현실은 내가 그렇다는 것을 가감 없이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에 늘 목이 말라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던져버리고 목숨을 바칠만한 강력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어떤 식으로든 나는 천재로 살 수 없다. 온 바다를 휘저으며 물살을 만들고 다니는 상어가 될 수 없다면, 그 물살에 몸을 맡겨 찢기지 않는 해라피로 살아야 한다. 대충 눈치 보고 대충 회피하는 안온한 삶. 아무것도 의미 없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참 많이도 언쟁을 했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내 기준 별로인 판단을 하면 조언이랍시고 무슨 말이라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굳이 싸우더라도 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굳이 조언하더라도 이 사람은 참고하지 못한다. 작든 크든 뼈가 있는 물고기들은 보통 겁도 없이 물살을 가르고 다닌다. 사람들은 다 제멋대로 살기 마련이다. 역시 해파리로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아무것도 의미 없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남에게 부정적인 냄새가 짙은 감정들을 쏟아 그를 상처 입힐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화가 좀 나도 한 번 입 다물고, 전부 다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포인트가 있으면 (속으로는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입을 다물었다. 대충 눈치 보고 대충 넘겼다.


 지점토 인간에서 해파리 인간이 되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날 선 모습들, 바로 윗 문단 괄호 안에 있는 내용 같은 것들을 마음속 여기저기에 숨겼다. 겉은 내가 바란대로 더 유연하고 편안하고 말랑해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젠장, 무척추동물은 척추동물로 진화한다. 나한테 뼈 비슷한 게 생겨버린 거다. 숨긴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아주 뾰족하고 딱딱한 척추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해파리가 되고 싶은 오징어의 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깨달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냥 오징어로서의 삶을 스스로 존중하면 될 텐데 나는 이미 해파리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오징어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자아분열이 시작된다.


 지킬 버전의 나, 해파리 가면은 대개 사람 좋은 척하고 앉아 있다. 눈치 단련이 아주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도 적당히 좋게 묻어갈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에 취할 때면, 그게 술이든, 극한의 피곤함이나 즐거움이든 그냥 나든, 갑자기 척추가 튀어나와 하이드 버전의 내가 되어 귀신이라도 들린 창처럼 분별없이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닌다. 그러다 정신이 들면, 하이드 버전의 내가 한 짓을 지킬 버전의 내가 질책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 돌연 포기해 버린다. 결론도 없이 합리화하고 넘어간다. 지킬 버전은 눈치 보느라 피곤하고 실제로도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이드 버전은 당연히 숨기고 언젠가는 없애버려야 할 존재다.


 여기서부터 지킬 버전을 혜킬, 하이드 버전은 혜이드라고 하겠다.


 요즘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데, 선생님은 혜킬과 혜이드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하셨다. 자아가 바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할수록 무의식은 남몰래 나쁜 욕망을 키운다. 혜킬이 해탈하고 싶어 할수록 혜이드는 괜한 것들에 집착하고, 혜킬은 그런 혜이드를 숨기고 싶어 하니 감정 처리에 약간의 오류가 생긴다.


 혜킬은 도무지 몰입하지를 못한다. 3초 이상 울지 못한다. 시원해지기도 전에 뚝 그치고는 '아 X발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회피해 버린다. 회피가 해탈은 아닌데. 얕은 분노, 얕은 슬픔, 얕은 부끄러움, 얕은 합리화, 얕은 믿음, 얕은 희망. 고맙게도 혜이드가 그런 혜킬이 대신 감정을 느끼려고 하는데 혜이드는 혜킬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런 바람에 과한 분노, 과한 슬픔, 과한 부끄러움, 과한 합리화, 과한 믿음, 과한 희망. 아무래도 양쪽 다 진짜는 아니다. 서로가 답답하다.


 이 글은 혜킬이와 혜이드가 손 잡고 구상했으나 혜킬이가 타이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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