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지면 차갑게 식을지도 모르니
"요란하지 않게 능력을 펼쳐라
뜨거워지면 차갑게 식을지도 모르니"
열차 안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하얀 여백과 마주하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새파란 하늘, 푸릇푸릇한 초록 나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캄캄한 어둠 속을 빠르게 지나갈 뿐이다.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은 이런 어둠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이 터널은 언제 끝나는 것인지.
얼마나 지났을 까.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드디어 눈에 담고 싶었던 풍경이 펼쳐졌다. 다소 흐린 듯한 하늘이지만 제 역할을 잊지 않은 듯 햇살 한 줌이 산 중턱에 내려앉았고, 탁 트인 산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집과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며, 갈 때마다 차 드렁크에 각종 야채를 한가득 실어주셨던 큰어머니 모습도 떠오른다. 창문 밖 정겨운 모습들을 눈에 담아보던 순간, 머릿속으로 한 문장이 스쳤다. "요란하지 않게 능력을 펼치자. 뜨거워지면 언제 또 차갑게 식을지도 모르니" 내 안에 내가 들려주는 말이었다.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던 시절, 나는 밤이고 낮이고 글을 써댔다. 머릿속 생각들이 행여 날아가버릴까 봐 생각이 들어오면 무조건 노트북을 켜서 긁적이곤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글을 쓸 때마다 몸과 마음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뜨거움은 언젠가 식기 마련이다. 이곳에 글을 쓰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 예상은 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즐겁게 쏟아내던 기간이 지나자 결과물에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성과를 내는 속도는 다르다지만, 내 속도는 너무 더디기만 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들려준 말은, '이건 어차피 내 직업이 아니야. 직업을 대하듯 자꾸만 이루려 들지 말자.'였다. 이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루고 싶다는 욕구가 스며들었지만, 참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 만 가지 욕구 중에서 한 가지 목표를 이룬 순간이 왔다. 그때의 감정은 그동안 상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연말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수상 소감 정도의 감정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이게 다란 말인가. 팔짝팔짝 뛰어다녀도 부족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덤덤하다니. 감정선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때 깨달았다. 오랫동안 갈망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로또 당첨 같은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기대했던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삶이 확 뒤집어지는 반전은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주어졌다는 것. 나는 그것을 요란하지 않게 묵묵히 책임감을 가지고 해내는 것에 더 집중하려 한다. 만세를 외치거나 폭죽을 터트리는 기쁨보다는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는 능력을 더 기르고 싶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는 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니까. 앞으로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뜨겁고 요란하게 달궈지는 것보다, 요란하지 않게 서서히 달궈지는 사람이고 싶다.
뜨거움 보다 더 좋은 것은, 끝까지 잘 해내는 묵묵함이다.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