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기의 민원실
사전투표 2일 차.
투표사무원은 아니었지만, 주민등록 담당 도명훈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투표하기 위해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 확인서(≒임시 신분증)를 받고 싶어하는 유권자를 위해 창구를 열어 뒀다. 임시 신분증을 받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을 해야 하고, 재발급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최근 6개월 안에 촬영한 사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 일을 해 줄 담당자가 있어야 한다. 휴일에는 세입 처리를 할 수 없으므로 수수료를 현금으로만 받아야 한다는 상급기관의 공문이 와 있었다.
짐작한 대로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투표하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도 서기에게 종종 다른 일을 물어봤다. 영문 주민등록표 등본을 인터넷으로 신청했는데, 이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아주머님이 계셨다.
"등본 발급은 오늘 어렵겠지만 인터넷 처리는 좀 해 주실 수 없나요? 오늘 꼭 필요해요. 내일 출국해야 하는데 프린터로 뽑으려면 여기서 일 처리를 해 줘야 하는데…… 좀 안 될까요?"
원래 그 일을 하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사전투표 사무원이 아니어서 집에 있었다. 요령을 듣고 그대로 처리했다.
"아유, 고맙습니다."
20대 중국인 여학생이 왔다. 외국인등록사실증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일 출국해야 하는데―내일 출국해야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꼭 필요하다고 했다.
"내일 출국하는데 외국인등록사실증명이 왜 필요하나요?"
"제가 한국에 유학 왔는데… 지금 외국인청에 갱신 신청을 했어요. 여기 확인서 있어요."
그녀가 출입국·외국인청에서 받은 확인서를 보여 줬다. 여권도 보여 줬다.
"등록증은… 4월 17일까지 와서 받아 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지난 주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거기 못 갔어요."
'비정상회담'에 나왔던 줄리안이나 '벌거벗은 한국사'에 나오는 조나단만큼 한국말이 유창하지는 않았지만―그 사람들은 그냥 한쿡 사람이지―, 의사소통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출국할 때 여권만 있으면 되지, 외국인등록증이 굳이 필요하나요?"
출입국·외국인청 일을 아는 건 아니지만, 소저의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도 서기가 물었다.
"제가 유학생이어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올 때… 유학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들어와야 하는데… 지금 외국인등록증이 없으니 외국인등록사실증명이 꼭 필요해요. 그거 없으면 한국에 못 들어와요!"
출국이 아니라 입국할 때 이게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소저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뭔가 결정적인 대사를 날리면 곧바로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뭔가 거의 끝에 다다른 상황.
도 서기는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해 주고 싶은데, 소저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미처 다 꿰차지 못했는데, 다른 기관―출입국·외국인청―일을 그가 어떻게 알까. 출입국·외국인청에 확인 전화를 해 볼 수도 없다. 오늘은 사전투표 2일 차. 투표 일을 하지 않는 기관은 다 쉬는 날 아닌가. 그리고 오늘은 세입 처리도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수수료는? 민원대 일은 사람을 참 쪼잔하게 만들어.
마침내 결정했다. 마음을 굳힌 다음에도 도 서기는 뭔가 고민하는 척 꽤 긴 시간 동안 각 잡고 앉아 있었다. 너무 쉽게 해 주면 상대방이 한국의 행정 체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잖아?
"……해 드릴게요."
마침내 소저가 그렁그렁한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이거 한 장으로 사람이 살아날 것까지야.
"네, 힘내세요."
너무 많은 기운을 행정 처리에 쓰는 것 같아 안쓰러워서 도 서기는 이렇게 말했다. 객지에서 살아 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만.
"중국 가면 사람들한테 잘해 주시고,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도 잘해 주세요. 수수료 2천 원입니다."
10개월 동안 억류된 손준호 선수 얘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 아가씨가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라.
발급하지 않아야 마땅한 서류를 발급해 주고, 휴일에 세입 처리가 안 된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받은 현금 2천 원을 돈통에 넣을 뿐 세입 처리는 하지 않았다. 다음 주에 세입 처리할 것도 아니면서 수수료를 받았다. 그렇다고 서류 받아 가는 사람한테 수수료를 안 받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차. 사실증명 발급·열람 신청서를 받아 놓고 다음 주에 거기에라도 증지를 찍으면 되지 않았을까? 정말? 그게 맞아?
참으로 어정쩡한 선택을 하고, 정확한 일 처리를 하지 않으면서까지, 심지어는 유학생이 입국할 때 체류자격이 '유학(D-2)'으로 새겨진 외국인등록증이나 외국인등록사실증명이 소저의 말대로 정말 필요한 게 맞는 건지 확인하지 않으면서까지 서류를 떼 줬으니, 난 정말 좋은 사람이 맞는 거겠지. 감사원에서도 날 좋은 담당자라고 여겨 준다면 좋겠는데.
출입국관리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2. "외국인"이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을 말한다.
출입국관리법 제10조의2(일반체류자격)
① 제10조제1호에 따른 일반체류자격(이하 "일반체류자격"이라 한다)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른다.
1. 단기체류자격: 관광, 방문 등의 목적으로 대한민국에 90일 이하의 기간(사증면제협정이나 상호주의에 따라 90일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체류자격
2. 장기체류자격: 유학, 연수, 투자, 주재, 결혼 등의 목적으로 대한민국에 90일을 초과하여 법무부령으로 정하는 체류기간의 상한 범위에서 거주할 수 있는 체류자격
출입국관리법 시행령 제12조(일반체류자격)
법 제10조의2제1항제1호에 따른 단기체류자격과 같은 항 제2호에 따른 장기체류자격의 종류, 체류자격에 해당하는 사람 또는 그 체류자격에 따른 활동범위는 각각 별표 1 및 별표 1의2와 같다.
출입국관리법 시행령 [별표 1의2] 장기체류자격(제12조 관련)
체류자격(기호) / 체류자격에 해당하는 사람 또는 활동범위
5. 유학(D-2) / 전문대학 이상의 교육기관 또는 학술연구기관에서 정규과정의 교육을 받거나 특정 연구를 하려는 사람
출입국관리법 제31조(외국인등록)
① 외국인이 입국한 날부터 90일을 초과하여 대한민국에 체류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입국한 날부터 90일 이내에 그의 체류지를 관할하는 지방출입국·외국인관서의 장에게 외국인등록을 하여야 한다.
출입국관리법 제33조(외국인등록증의 발급 등)
① 제31조에 따라 외국인등록을 받은 지방출입국·외국인관서의 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외국인에게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하여야 한다.
출입국관리법 제88조(사실증명의 발급 및 열람)
② 지방출입국·외국인관서의 장, 시·군·구 또는 읍·면·동의 장은 이 법의 절차에 따라 외국인등록을 한 외국인 및 그의 법정대리인 등 법무부령으로 정하는 사람에게 법무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외국인등록 사실증명을 발급하거나 열람하게 할 수 있다.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 제75조(사실증명의 발급)
② 법 제88조제2항에 따른 외국인등록 사실증명의 발급이나 열람은 본인이나 그 법정대리인 또는 그로부터 위임을 받은 자가 청장·사무소장·출장소장이나 시장·군수·구청장 또는 읍장·면장·동장에게 신청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