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깎이 미술사학도 Apr 02. 2024

얼굴 크고 못생긴 부처님 - 2

이렇게 큰 불상을 세운 이유가 대체 뭘까

사진1.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사진 출처 : 문화재청)


오랫동안 미륵으로 여겨져온 이 석상은 조선 후기 들어 관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사진1). 조선 후기의 고승인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의 시문집,『환성시집』에는 부록으로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가 관촉사 상을 보고 지은 시가 한 수 실려있다.




月潭讃灌燭觀音大像 (월담이 관촉사 관음대상을 찬탄하다)


巍巍落落爍迦身  높이 우뚝 솟은 삭가*의 몸이여

掌上花開外春  손바닥 위에 꽃이 피니 겁 밖의 봄이로다

鷄足金襴都不管  계족산의 금란가사** 전혀 상관하지 않고

無聲三昧也嚬呻  소리 없는 삼매로 크게 포효하는구나


*삭가(爍迦) : 금강처럼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몸.

**계족산의 금란가사 : 미륵이 성불한 뒤 가섭존자에게 전해받는 석존의 가사.



한평생 깨달음을 추구하던 선승이 지은 시이므로 한낱 중생에 불과한 필자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시의 제목에서 관촉사 상을 관음대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주목할 만하다. 시문에 계족산의 금란가사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어 미륵과 연관된 것으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세간의 인식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닐까 짐작된다. 승려 각안(岸, 1820~1896)이 저술한『동사열전』에서도 관촉사 상을 석상관음불(石像觀音佛)로 칭하고 있으며, 권상로(老, 1879~1965)의『조선불교약사』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승려들의 인식이며, 세간에서는 여전히 이 상을 미륵으로 여겨왔다. 1917년 6월 27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를 보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灌燭寺探勝會(관촉사탐승회)는 단양가절을 당하야 거행하게 되얏더라. 상오 9시에 회원 일동 400여명이 회동하야 황색홍색의 휘장을 꼿고 탐승기를 압세 워 출발하얏다. 그 행렬 중에는 행화 춘선의 두 기생이 참가하야 가위 만록총중 일점홍의 기관이 되얏고 또 이날은 단오날이오 겸하야 본분국의 탐승회가 잇슴으로 관촉사를 향하는 사람이 연로에 널리엿더라. 일행은 관촉사 동구압에서 대바위라 일컷는 천연으로 대모양을 일운 기암괴석을 구경하고 절 경내에 드러가는데 유명한 은진미륵은 일행을 반기는 듯 하더라. 절 경내의 풍광을 구경하고 상 오 11시 30분부터는 관촉사 수월궁에서 흥행하는 림성구 일행의 신파연극을 관람하고 맛칫 뒤에 청유를 시험하다 오후 7시에 회환하얏는데 관촉사 경내는 가위  인산인해를 이루엇더라."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승려로 대표되는 불교 지식인들은 관음으로, 불교 교리에 밝지 않았던 일반인들은 여전히 미륵으로 여겼던 듯하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승려들이 관촉사 상을 관음으로 인식한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 불교 도상의 인식 체계가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쉽게도 필자의 능력으로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불교학 연구자이신 남동신 선생님의 견해가 주목할만하다 생각하여 소개하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현존 최고의 기록은 고려말 (목은)이색이 지은 시인데, 여기에는 미륵으로 되어있다. 조선 초인 15세기 후반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이 목은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말선초에는 미륵상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상호 명칭에 변화가 보인다...(중략) 환성지안을 필두로, 20세기 초반까지는 관음설이 통설이었다. 조선 후기에 왜 미륵에서 관음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메시아적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을 집권세력이 경계하고 억압하던 조선 후기의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즉, 미륵을 미륵이라 부르지 못하는 억압적 분위기 하에서, 불교계가 종래의 미륵을 관음으로 바꾸어 불렀을 가능성이 짙다..."


- 남동신,「미술사의 과제와 역사학 - 불교미술사를 중심으로」,『미술사학연구』268, 한국미술사학회, 2010, 97쪽. - 




관촉사 석조상이 만들어진 배경


지금까지 관촉사 석조상의 도상적인 측면을 살펴보았으며, 고려와 조선에서 미륵과 관음으로 인식되었던 역사적 맥락도 다루어보았다. 미륵이냐 관음이냐의 문제는 현재로서는 학자들간의 의견이 분분하고 필자 역시 이 주제를 공부만 했지 연구한 적은 없으므로 함부로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다(공부와 연구는 다르다). 다만 관음이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시점이 조선 후기라는 사실은 이 상이 본래 미륵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실어준다. 이어서 이토록 거대한 조각이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가를 다루어보겠다.


관촉사 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고려 당대의 기록은 이전에 언급한 이색의 시가 전부이다. 그리고 조선 초의『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 광종대 혜명이라는 승려가 만들었다는 짤막한 내용만 전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조선 영조대에 세워진「관촉사사적비(1743)」에 이 상이 세워진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다(사진2).


사진2. 관촉사 사적비(사진 출처 : https://ncms.nculture.org/archival/story/4698)





"옛날 고려 광종 19년(968)에 사제촌(沙梯村)에 사는 여자가 반야산(盤藥山)에서 고사리를 캐고있는데, 산의 서북쪽 모퉁이로부터 홀연히 아이의 소리가 들리므로 나아가 본 즉, 큰 돌이 땅속으로부터 솟아나오고 있었다. 마음이 놀라고 괴이하여 집에 돌아와서 자기 남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남편이 즉시 관아에 고하여 원님으로부터 차차 위로 고하여 왕께 아뢰었다. 왕이 그 일을 백관 회의에 붙이니, “이것은 반드시 불상을 만들 징조이다.” 라하여 상의원(尙醫院)으로 하여금 팔로(八路)에 영을 전달하여 능력있는 사람을 구하고, 혜명(慧明)이란 승려가 응하니, 조정에서는 장인 백여명을 선발하였다. 경오년(970)에 일을 시작하여 병오년(1007)에 준공하였으니 무릇 37년이 걸렸다. 불상이 이미 완공된 후 도량(道場)에 모시려고 하여 마침내 천여 명이 힘을 합쳐 옮겼는데 머리부분이 연산(連山)땅 남촌 이십 리에 도착하자 그로 인해 마을의 이름을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혜명(慧明)스님이 비록 불상은 완성하였으나 세우지를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사제(沙梯)마을에 도착하자 두 명의 동자가 진흙으로 삼동불상(三同佛像)을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평지에 먼저 그 몸체를 세우고 모래흙을 쌓은 뒤 그 가운데에 다음을 세워 다시 이처럼 하니 마침내 그 마지막 부분도 세우는 것이었다. 혜명이 주의 깊게 보고는 크게 깨닫고 기뻐하였다. 돌아와서 그 규칙과 같이 하여 이에 그 불상을 세웠으니 동자는 바로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이 현신(現身)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의 신장은 55척 5촌, 둘레는 30척이고 귀의 길이가 9척, 눈썹사이가 6척이며 입의 지름은 3척 5촌, 화광(火光)이 5척이다. 관의 높이는 8척이니 큰 덮개는 넓이가 11척이고 작은 덮개는 6척 5촌이다. 작은 금불은 3척 5촌이고 연화(蓮花)의 가지는 11척인데 혹은 황금을 칠하고 혹은 붉은 구리로 장식하였다." (중략)




사적비의 내용에는 아이의 소리가 들리고, 돌이 솟아나왔다는 등 허구적인 요소도 어느정도 섞여있다. 그러나 광종 19년부터 상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조정에서 진행되었으며, 혜명이라는 승려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선발된 100여명의 장인을 파견하였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계획된 큰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정보는 이러한 대규모 불사의 시작이 광종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전부터 광종이 실시한 정책과 어느정도 관련성이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종은 고려 4대 국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많이 했던 인물이다. 특히 노비안검법이나 공신세력 숙청 등 호족들을 견제하는 정책을 많이 폈다.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세력을 누름으로써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힘의 과시만으로는 왕권 강화에 한계가 있다. 왕의 권위를 뒷받침해줄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일도 필요했다. 그래서 쌍기로 대표되는 귀화세력을 중용하였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참신한 인재들을 선발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더불어 불교계도 장악하려 했다.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던 이념과도 같은 것이어서 불교계를 장악한다면 자연스레 왕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화엄종 승려였던 균여(均如)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광종이 균여를 중용한 까닭은 그가 성상융회(性相融會)*라는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불교 종파간의 통합 - 특히 화엄종과 법상종 - 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균여의 뜻대로 종파간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새로이 통합된 종단은 광종의 왕권을 뒷받침 하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며 호족세력이 후원하던 선종을 견제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었으리라 본다. 


*성상융회 : 화엄종과 법상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균여가 수립한 사상적 체계.


더불어 승과도 실시하였다. 국왕은 승과를 통해 불교 관련 업무를 맡아볼 승려들을 선발하였으며, 선발된 인재 중 일부를 전국 사찰의 주지로 파견하였다. 특정 사찰에 주지를 파견한다는 의미는 그 사찰이 조정의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가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왕권을 강화시켜주는 조치였다.


또한 광종은 오랫동안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후백제 지역을 주목하였다. 이 지역 출신 인재들은 후삼국 통일 전쟁의 여파로 장기간 차별 받았기에, 중앙 정계에 이렇다할 기반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광종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친위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 상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관촉사의 대규모 불사이다. 논산은 과거 후백제의 핵심적인 군사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였다. 일찍이 태조 왕건은 후백제 패망 이후 이 지역에 개태사를 창건한 전력이 있다(사진3). 민심수습을 명분으로 내세웠겠지만 이 지역의 반 고려적 기운을 감시ㆍ견제하려는 의도 역시 숨어있었을 것이다.


사진3. 936년 세워진 논산 개태사지 삼존불 입상(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러나 광종이 논산 관촉사에 대규모 불상을 세운 배경은 태조와는 달리 후백제 지역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이거나 이 지역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대규모의 불사를 계기로 관촉사에 관리를 파견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광종이 이 무렵 관촉사를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리고 때마침 광종의 측근이던 균여가 참소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968년). 균여의 활동은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균여에 대한 참소는 광종에 대한 호족들의 반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간 성상융회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광종의 불교 정책은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촉사의 석상을 미륵으로 전제한다면 관촉사는 법상종에 속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는 법상종의 세력을 키워 광종의 정책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균여의 참소로 일격을 맞은 광종은 법상종의 세력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 계책을 고민했을테고, 그 결과 관촉사의 대불사를 기획했을 개연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불교 세력들은 관촉사에서 벌어지는 크나큰 불사에 반발심이 없었을까? 광종은 그 부분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본래 충청과 전라권역을 아우르는 백제 문화권에서는 오래전부터 미륵을 강하게 신앙하였다. 백제 무왕은 제 2의 수도로 점찍었던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신라 경덕왕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진표율사는 미륵도량인 금산사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시행하였다(사진4). 이 지역 미륵신앙의 전통은 숭유억불의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부여의 무량사와 청양의 장곡사에서는 이례적으로 석가모니가 아닌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괘불탱을 조성할 정도였다. 따라서 미륵을 중시하는 법상종 사찰을 세우는 건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반발심이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좋아하지 않았을까?


 

사진4. 김제 금산사 미륵전. 766년 진표가 중창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려 1635년에 재건하였다.(본인 촬영)



이상으로 논산 관촉사 석조상에 대하여 글을 써보았다. 먼저 외형을 살펴보았고,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존명(尊名)에 대한 이견과 거대한 석상을 만들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다루어보았다. 딱딱한 논문들을 읽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정리하여 쓰려니 쉽지 않았다. 세세한 내용을 모두 다루지 않아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기도 하고 필력이 부족한탓에 문장이 딱딱하여 독자분들이 읽다 지치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도 있다.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시간날 때 천천히 읽어주시길 바랄 뿐이다.



이렇다할 잡생각 :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이 관음이냐 미륵이냐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의견이 나오지 않아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만큼 이 상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미술사 전체를 놓고 봤을때 단일 작품으로 이렇게나 많은 연구가 진행된 사례도 드물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넘치는 개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든다. 관촉사 상을 보면서 각자 삶의 방향을 수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요즘은 평균이 평균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부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큰 거 빼면 잘난것 하나 없는 관촉사 상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을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룬게 없다고 좌절하는 대신 관점을 바꿔 각자의 개성을 펼치면서 살아보는건 어떨까.


https://www.youtube.com/watch?v=11HWXW_rePc&t=124s

매거진의 이전글 얼굴 크고 못생긴 부처님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