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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Apr 12. 2024

79년만에 돌아온 백제의 미소

호암미술관에 전시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특별 전시장 입구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동아시아 불교미술과 여성의 역할을 조망하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의 목적과 의도를 떠나, 불교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과 연구자들에게는 이번 전시가 매우 각별할 것이다. 미술사 책으로만 접하던 해외의 우수한 작품들이 대거 선보였기 때문이다. 전시의 서막을 장식한 작품은 15세기 제작된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였다. 두 그림은 본래 한세트로, 조선 초 왕실발원 불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사진1).

사진1. 좌측이 석가탄생도, 우측이 석가출가도


그 외에도 고려와 남송(南宋), 일본의 아미타불화, 원(元)의 이모육불도, 에도시대의 구마노관심십계만다라 등 동북아시아 3국을 대표할만한 수준 높은 불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진2)


사진2. 좌측 : 구마노관심십계만다라  중앙 : 남송의 아미타불화   우측 : 일본의 아미타불화


또 이번 전시의 한 축을 이루는 존재는 관음(觀音)보살이었는데, 동북아 3국의 관음보살도와 더불어 목조 관음보살상과 백자 관음보살상 등 처음보는 조각들이 많아 눈을 즐겁게했다. 아마 이번 전시를 기획한 분은 근엄한 모습의 부처보다는 자비로운 보살이 여성성과 보다 부합한다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보살의 대표격인 관음보살을 많이 전시한게 아닌가 한다. 실제로 여성들이 관음보살을 많이 신앙하기도 했다.(사진3)


사진3. 좌측 : 고려 수월관음도   중간 : 명(明) 송자관음보살도   우측 : 에도시대 일엽관음보살도


그 많은 관음보살 중에서도 오랫동안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가 한 분 있었다(사진4). 

그의 이름은 바로 '금동관음보살입상'. 필자 뿐 아니라 국내의 많은 불교미술 연구자들이 보고 싶어했던 존재였다. 박물관 측에서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공간에 단독으로 배치했다. 


사진4. 금동관음보살입상, 백제 7세기, 금동, 높이 26.7cm, 개인소장



우여곡절 끝에 모습을 드러낸 금동관음보살입상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관음상은 1907년 부여 규암리의 한 폐사지의 무쇠솥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는 유실물로 보관하고 있다가 경매에 부쳤다. 이후 모씨가 낙찰을 받아서 소장하다가 1922년 문화재 수집가였던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에게 팔았다. 1929년에는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에 출품되었으며, 1931년에는 세키노 다다시가 이치다 지로의 집을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관람하였다. 해방 이후 경주박물관에 귀속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이내 행방이 묘연해졌다. 어쩌면 정부수립 이전의 혼란기나 한국전쟁기를 틈타 반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 상은 흑백사진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사진5). 


시간이 한참 흐른 뒤, 2018년을 즈음하여 이 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공개되자마자 '백제미소보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탔으며, 환수를 바라는 여론이 생겨났고 실제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환수는 불발되었다. 왜냐하면 2020년 당시 소장자가 150억을 요구했는데, 문화재청이 42억 이상은 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소장자 입장에서는 아쉬울게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문화재청의 태도인데, 환수 예산의 증액을 시도한다거나 정치권에 환수 의지를 어필하는 등의 노력은 전혀 없었다. 지난 정부에서도 그랬고, 이번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백제미소보살은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다.

사진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건판 36898)


그러던 이 상이 4년만에 다시 등장했다. 호암미술관을 통해 고국을 찾은 것이다. 호암미술관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덕분에 국민들은 귀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가망이 없으니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꼭 보고 오시길 권한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외형과 특징


1. 외형

이 상의 높이는 26.7cm, 재질은 금동이다. 머리에는 아미타 화불을 모신 보관을 썼고, 목에는 사각형 형태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왼쪽 어깨에 걸친 승각기(내의)의 어깨 끈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끝단과 이어졌다(사진6). 또한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천의는 한번 꼬인채 허리를 지난뒤, 오른쪽 허벅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무릎을 한차례 가로지르고서 오른팔에 감겨있다. 원래는 오른팔을 지나 아래쪽으로 늘어져 있었겠지만 현재는 부러진 상태다. 하반신에는 군의(裙衣, 치마)를 입고 있으며, 허리쪽에 짧게 늘어진 옷자락은 허리끈을 동여맨 뒤 군의자락의 윗부분을 뒤집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왼쪽 다리에 무게 중심이 실려있으며,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 발은 원형의 받침대를 밟고 있어 안정적으로 서있기가 용이하다(사진7).


*삼곡 : 보살상의 목과 허리를 꺾어 몸이 S자 모양으로 굴곡져 보이게 표현한 것.

사진6. 금동관음보살상의 보관과 상반신
사진7. 금동관음보살상의 하반신과 발 받침대


오른팔은 허리 높이에서 'ㄴ'자 형태로 구부리고 있으며, 허벅지까지 늘어뜨린 왼팔은 손목을 살짝 꺾은 채 살포시 정병을 들고 있다.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이며, 상호는 마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마냥 꽤나 동안으로 표현되어있다. 얼굴에는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뒤를 보면 머리와 등에는 광배를 꽂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으며, 어깨에는 검은색 보발이 흘러내리린다(사진8). 양 어깨에 걸친 의복과 허리 춤의 뒤집힌 군의, 군의자락에 새겨진 옷주름으로 보아 거신광*이 아닌 두광만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거신광 : 불보살의 몸과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하나로 합쳐 표현한 광배. 


사진8. 머리에는 두광을 꽂았던 구멍이 있고, 등에도 무언가를 꽂았던 돌기 형태의 흔적이 남아있다.


2. 특징


1) 미소

얼굴에 머금은 미소는 규암리에서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부여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입상에서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서산마애삼존불,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 납석제 불상, 공주 송정리 출토 관음보살상 등에서도 확인되는 백제지역 불교 조각의 특징이기도 하다(사진9). 물론 동시기 신라에서도 미소 띈 불상이 종종 보이지만, 백제지역 조각의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다소 거칠지만 한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백제지역은 산이 많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평야가 넓어 풍요로운 생산력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일찌감치 해로를 통해 중국의 남조 및 수ㆍ당과 교류를 함으로써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곳간이 넉넉하니 자연히 인심이 너그러워지고 그러한 심성이 자연스럽게 불상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에도 충청도 사람들은 타 지역민에 비해 말이 느리다고 놀림받곤 하는데, 오래도록 풍요로웠던 경제적 기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9. 미소가 아름다운 백제의 불보살상


2) 보관

보관의 정면에는 화염형 장식 내부에 작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도 별도의 화염 장식을 붙였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임영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는 수나라 말~당나라 초 보살상의 특징이다(사진10).

사진10. 금동보살상의 보관에 붙은 화염형 장식을 돈황 막고굴 제57호굴에 그려진 관음보살과 비교해보세요



3) 천의와 승각기

보살의 신체를 두번 가로지르는 천의 표현 역시 수대 보살상의 영향이다. 어깨 끈 달린 승각기의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승각기는 특히 가장자리에 새겨진 문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연구나 이번 전시의 도록에서는 이를 넝쿨 문양(당초문)으로 설명하면서 백제금동대향로와 외리 출토 문양전에서 확인되는 문양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사진11, 12). 필자가 보기에 이들 문양들은 넝쿨이 아니라 구름이다. 문양전의 용과 어울리는 존재는 구름이고, 금동대향로의 구름은 산수로 표현된 이상세계를 아래쪽 세계와 구분하는 모티프로 활용되었다고 보인다. 또 유사한 문양이 능산리 고분군의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백제인들이 중국의 양식을 수용하되, 자신들의 미감에 맞게 변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1. 왼쪽 : 부여 외리 출토 문양전,  중앙 : 백제금동대향로  우측 : 부여 능산리 1호분 벽화
사진12. 승각기 가장자리의 문양. 넝쿨이라기 보다는 구름에 가깝다. (사진출처 : 임영애,「백제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의 流傳, 그리고 그 성격」,  미술사와 시각문화, 15쪽)



4) 삼곡 자세

원칙적으로는 보살도 여래처럼 남성이지만 자비를 강조하기 때문인지 신체의 표현이 다소 여성적으로 발전해갔다. 때문에 부드러운 상호의 표현과 더불어 신체의 곡선미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속적인 인도 불교 의 영향은 조각으로 하여금 사실성을 추구하게 하였다. 특히 당나라 시기의 조각에서 이러한 사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의 굴곡진 몸매에서 모티프를 얻은 삼곡(三曲) 자세도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이다. 이 상도 약간의 삼곡자세가 드러나는데, 왼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싣고 골반을 살짝 비튼 모습이다.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있으니 오른쪽 다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따라서 힘 빠진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실제 짝다리 짚은 사람을 보고 만든 것 마냥 자연스럽다(사진13).  


사진13. 삼곡 자세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금동관음보살상. 힘 빠진 오른쪽 무릎은 살짝 굽히고 있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조성 시기


이번 글을 적으면서 참고한 임영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 관음상의 조성시기는 의자왕 시기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앞서 설명한 보관의 화염장식, 어깨 끈이 달린 승각기와 승각기 끝단의 문양, 두줄의 천의 자락, 삼곡 자세이며, 이를 종합하면 백제 미술의 최전성기인 7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 


흔히 나라가 쇠퇴하면 미술 역시 그 기상을 잃고 기존의 도상과 양식을 답습하게되며, 망조가 들면 그런 흉내 마저 못내는 말기적 양상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제의 미술에서는 그런 양상을 관찰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백제는 내부적 요인으로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는 의자왕의 타락이 거론된다. 의자왕이 어느순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삼천궁녀와 주색잡기에만 몰두하다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백제는 신라와 계속 전쟁을 벌이며 신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신라는 당(唐)과 손을 잡았고, 백제는 두 나라의 양동작전에 손을 쓸 틈도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의자왕의 잘못이 있다면 신라를 몰아붙이는데 열중한 나머지 국제정세를 살피는데 소홀했다는 점이다. 만일 백제가 스스로 멸망한 것이라면 규암리에서 출토된 관음상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삼국 중에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국가는 백제였다는 점에서 백제의 멸망은 정말이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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