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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May 18. 2022

사소한 좌절 그리고 사소한 감동

나는 글의 기능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대 보기로 했던 거다. 그런데 마음을 다 쏟아내 글을 쓰고 나니 나의 맨몸이 노출된 것처럼 아찔했다. 그래서 지웠다. 매일 글을 썼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글이란 바다에 생각과 마음을 던짐으로써 물결치는 심연 속에서 무언가 잡히기를 매일같이 기도했었다. 조용한 가운데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만 보였다. 상처받은 나의 마음만 홀연히 떠올라 물에 비친 내 모습이 상으로 맺혔다. 그것은 더욱 깊은 마음의 골을 팠고 해결되지 않았다.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혼돈을 막을 수도 잠재울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내 안에서 일어났던 감정이 그 감정을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는 인지적 사고 즉, 메타인지의 눈으로 관찰되고 통제되고 판단되어 차츰 성난 파도가 잠잠해지듯 결국 고요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잠잠해진다는 건 본질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성난 파도는 언제고 또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로 들어선 배는 당분간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두 주 동안 느꼈던 감정은 입체적이었다. 이성적 판단이 흐려질 때 격동한 감정은 그 틈을 비집고 올라와 혼돈의 상태를 만들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이고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무의식의 세계에 잠자고 있던 자아는 먹잇감이 보이면 사납게 달려들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나는 대체 엄마이기는 한 걸까.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분열되어 있나. 아주 낮은 곳에 깔려 있는 그 마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어둡고 날카로운 면이 자꾸 고개를 드나 싶었다.


- 우리는 나눔 속에서 고독의 심연을 건널 다리를 놓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코로나 격리 기간 동안 난 사람이 얼마만큼 수동적일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사실 사람은 능동적 사고에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그 성취감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주길 무엇보다 지친 내 몸은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게 화근이었다. 아이들은 놀이를 제외한 모든 것에서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고 난 점점 지쳐갔다. 1주일의 학업 공백은 그동안 연명해 왔던 공부 습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몸이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엄마로서 아이를 배려한다는 마음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줌(ZOOM)으로 학급별 학부모 회의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 아이를 제외한 참여 학부모 자녀들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다른 집 아이에 대한 칭찬이 우리 집 아이에 대한 지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엄마인 내가 우리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너무도 닮아있는 게 아닌가.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쓴다느니 손을 번쩍번쩍 들고 발표를 잘 한다느니 쉬는 시간에 그림을 잘 그려 친구들이 몰려든다느니... 우리 아이는 왜 그러지 못하나. 나의 시선은 우리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교하고 있었구나. 그것도 아주 심하게. 2년여 정도 해오던 축구 교실을 그만두는 순간에도 아이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동안 뒤에서 오징어처럼 뛰어다녔을 아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좋고 싫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말해줬으면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찔끔찔끔 감정에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남편과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날이 언성이 높아지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에 왜 그러는지 궁금해하고 때로는 나보다 더 엄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낯선 남편을 보면서 시작된 대화였다. "자기, 나 보라고 아이들한테 엄하게 하고 큰소리도 내고 그랬던 거지?" 하고 물으니 남편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화를 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여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남편은 좀 느긋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자고 했다. 뭐가 그렇게 조급하냐고 물었다. 난 아이가 무엇을 잘 하는 줄 알고 응원해 주려 했으나 다른 집 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높게 날고 있는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조급해지고 내 아이를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진다고 털어놨다. 그걸 내려놔야 하는데 놀이 외에는 대부분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아이를 보면서 그 답답함이 걱정을 등에 업고 화를 내뿜는 괴물이 됐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 화를 쏟아내고 꼬맹이를 꾸역꾸역 어린이집에 보내고 남편과 단둘이 앉아 점심을 먹는데 목구멍이 꽉 막혀 음식물이 넘어가질 않았다. 나도 아는데 잘 안돼. 나의 부모스럽지 못한 모습에 아이들이 상처받고 잘못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죄인이 된 것 같아. 근데 그 조절이 이상하게 잘 안돼. 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어. 이기적이지. 아이들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과연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초 단위로 세고 있는 것 같아. 블라블라... 콧물인지 국물인지 모르게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세먼지로 덮여 있는 자동차 유리를 와이퍼로 쓱쓱 닦아내는 기분이랄까.


남편과 나눈 대화는 내 깊고 어두운 심연을 건널 다리를 놓는 것처럼 차츰차츰 그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여울 작가의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에서 그녀가 말했듯 울어도 되는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향한 아주 작은 배려만으로도, 아주 사소한 따뜻함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환해지고, 너그러워지고, 푸근해진다.'라고 말하는 여울 작가의 말대로 내 마음은 추운 겨울을 지나 환하고 포근하고 생명에 너그러운 평화를 되찾고 있는 게 아닌가. 간밤에 아들 손을 잡고 '다시 좋은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어', 순간 아이는 '그래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들어 웃어준다. '같이 노력해야해' 하고 말하니 '저도 노력해 볼게요' 한다. 꼬맹이도 잠들기 전 '내일부터는 짜증 부리지 않고 잘 해볼 거야.' 다짐을 해준다. '고마워' 하고 말해줬다.


아이들을 집에 두고 잠시 물건을 찾으러 다녀오는 길에 길가에 피어나는 예쁜 봄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의 마음이었다면 난 그 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잘 해보겠다고 애들이랑 이야기했어.' 하고 말하니 '언제?' 하며 내 손을 꼭 잡는다. '자기 이번에 너무 수고 많았어' 하고 말해주는 남편이게 살짝 다가섰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쌓였던 눈이 녹는 것처럼 온몸에 따뜻함이 번진다. 매일 좌절하고 매일 새롭게 일어나는 우리의 삶이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큰 덩어리로 한꺼번에 몰아쳐 오지 말고 매일 조금씩 좌절하고 일어서며 사소한 감동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글을 왜 써야 하는지 또 한 번 긍정적 동기를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은매순간다르듯

#엄마는어제와오늘이다르듯

#사소한좌절과일어섬의반복으로

#사소한감동을느낄수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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