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대전. 이제 새 보금자리로.
10년 넘은 대전살이를 정리하고 남편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왔다. 나 여기서 얼마나 살려나?
남편의 고향이자 남편의 직장이 있는 경기 남부의 소도시. 남편에겐 무척 익숙하고 편안한 도시. 하지만 나는 이곳에 정착하고 싶지 않았다. 수도권이지만 대학병원이나 문화생활을 할 만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없는 이곳. 지방인 대전보다 인프라가 부족한 더 지방 같은 곳. 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 내 커리어, 내 시간들 다 포기하고 온 곳이 그저 그런 환경의 이 도시라면. 남편은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불투명하다고 했다. 어쨌든 언젠가는 이전한다고 하니, 나는 다만 그때가 아이의 긴 학교생활이 안정되기 전이었으면 싶었다. 전학을 오고 가는 환경을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 뒤를 기약하며 아니, 조금 더 양보해서 4년쯤 후에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10분 거리에 시어머니 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합치기 전까지 남편이 살았던 집.
남편이 코 밑 거무스름한 중학생 시절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았던 집. 시어머니가 불편한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는 우리에게 뭔가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뭐 더 챙겨줄 것이 없나 늘 우리의 양손 가득 뭔가를 쥐어 주시는 분이다. 계절마다 과일과 채소를 박스 채로 보내주시고 쌀이며 온갖 양념들, 반찬들, 일반 생필품까지 계속 주신다. 아마 자식들을 다 출가시켰지만 오히려 어머님 생활비는 세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또 시어머니는 굉장히 바쁘시다. 건강을 위해 매일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시며, 주말은 늘 모임과 약속으로 꽉 차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왔어도 우리를 자주 부를 분이 아니시란 얘기다. 혹시 부르신다고 해도 식탁 한가득 차려 우리를 먹이시려 하지, 절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시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 이사로 보통의 가족처럼 저녁이면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을 거고, 아이들은 매일 아빠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으며, 남편은 육아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고 더 이상 남편과 나는 무분별한 신경전을 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다. 물론 기대의 바탕엔 이곳에서 오래 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