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
‘한국어에 이런 말이 있어. 인연이라는. 섭리나 운명을 뜻하는 건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거야. 불교와 윤회사상에서 온 개념 같아.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해. 전생에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거든. 그 둘이 결혼하면 8천 겹의 인연이 쌓인 것이라고 하지. 자그마치 8천 년의 시간 동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감독인 셀린 송은 자신의 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의 주제를 ‘관계’로 잡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단초로 ‘인연’을 선택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여 자칫 식상하기까지 한 인연이라는 개념은 셀린 송 감독을 만나 그녀의 절제된 시나리오와 섬세한 연출을 거치며 붙잡지 못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 붙잡지 않은 시대의 유산으로 거듭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나의 인연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일까? 인연을 사전적 해석에 기대어 단순한 관계 맺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를 나의 인연이라고 천명할 수 있겠지만, 보통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인연은 시간의 손길이 닿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관계, 내 인생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 관계에 적용되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가 어떤 관계를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점은 누군가를 만난 당장의 시점이 아니라 인연이라는 자격을 획득할 만했다고 판단되는 시점, 즉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이 좀 더 온당해 보인다.
영화에서의 인연에 대한 해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 해성은 왜 24년이 흐른 후 결혼까지 한 나영을 찾아 뉴욕으로 날아갔던 걸까? 해성이 나영을 만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나영은 왜 집요하게 해성에게 자신을 12년 전에 찾은 이유에 대해서 물어봤던 걸까? 해성의 말처럼 12살 때 헤어지지 않고 그대로 함께 했었다면 두 사람은 이처럼 특별한 의미로 상대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위해 다시 한번 인연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내가 누군가와 인연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시점이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관계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의 시점, 심지어는 그 관계가 끝이 난 이후의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재정의를 기반으로 이들의 행동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좀 더 용이해진다.
해성과 나영의 관계는 시작과 끝이 한 번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12살에 처음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타의에 의해 끝나야 했고, 24살에 다시 한번 재점화되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끝인 듯 끝이 아닌 듯 흐지부지하게 꺼져버리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관계가 인연이었음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정확히 확인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니 또다시 12년이 흐른 뒤 만나고자 했던 이 두 사람에게 필요했던 일은 여전히 각자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으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상대의 자리를 찾아주는 일, 즉, ‘너는 나에게 무엇이었나’의 확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확인할 만큼의 시간이 주어졌기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결국 귀한 인연이었음이 확인된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드물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으니 운명의 상대로서 순순히 수용하는 일만 남은 걸까? 안타깝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이번에도 이유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앞서 말한 대로 인연의 지표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존재였다 라는 진실이 수면 위에 명확하게 떠오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삶도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시간의 행로에 맞춰 이리저리 부딪히며 굽이굽이 흐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한다. 이제 성찰의 시간이 주어지고 깨달음의 순간이 도래한다. 마침내 그 누군가가 나의 인연이었음이 명확해진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시간이, 그것도 너무 긴 시간이 흐른 탓에 나의 인연에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난 것이다.
12살에 헤어지고 난 후 12년이 흘러 우연히 서로를 찾게 된 해성과 나영은 뛸 듯이 기뻐한다. 20대의 청춘이 되어 조우한 두 사람은 아이 시절에 미처 못다 한 과제를 해나가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급속도로 몰입하고 빠져든다. 그러나 떨어져 있던 그 시간 동안 이미 시작되어 버린 이들의 삶이 또다시 두 사람을 막아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네’가 아닌 ‘나’를 선택하고 만다.
이때가 이들에게는 서로를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경로를 확정 짓기 전인 20대였기에 원하기만 했다면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는 여전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아버리면서 두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각자의 인생에 새로운 인연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예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한 사람의 인생의 기간에 맺게 되는 인연이라는 것이 결코 특정한 누군가와의 단 한 번만의 인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성과 나영은 분명 인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 그들은 서로의 특별했던 온도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순간에 해성과 나영은 관계를 포기하고 각자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함께 할 수 있는 미래, 인연으로 꽃 피울 수 있는 미래를 포기해 버렸다.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듯 이들의 인연 역시 무한정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쉬움과 미련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흔히 우리가 겪게 되는 감정이지만 이것이 관계에서 발생할 때만큼은 우리에게 냉철한 판단과 확고한 결단을 요구한다. 관계를 현재에 존속시킬 것인가, 과거로 귀속시킬 것인가의 기로에 설 때 우리에게는 설득력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근거 혹은 이유가 필요해진다.
해성과 나영은 36살이 되어서야 마침내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12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랜 친구 둘의 단순한 재회가 아니었다. 해성과 나영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주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해서야 풀 수 있는 문제란 무엇이었을까?
나영이 떠나버린 후 해성은 새로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해성을 떠난 나영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 그에게 정착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 서로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감정은 상대의 부재를 이유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도 과거의 상대를 통해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여전히 심연에 자리한다. 묻어놓은 감정을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람에게 온전히 감정을 쏟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결국 이 감정은 종식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 해야 이 감정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이 감정에는 주인이 있었다. 따라서 이 감정의 종식은 이 감정의 주인을 나의 삶에서 재배치하는 일, 즉 여전히 나의 현재에 위치하는 상대를 감정이 일어났던 과거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36살의 해성과 나영이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12살 소년으로 나영을 사랑했던 해성은 그 마음을 다시 12살 때의 자신에게로 돌려보내야 했고, 12살에 해성을 좋아했던 나영은 그 마음은 영원히 12살의 해성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서로가 소중한 인연이었기에 그것의 유효기간이 다했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알리고 인정하는 행위는 차가운 영상이 아닌 진실된 말과 눈빛으로 치러지는 따뜻한 체온을 지닌 의식이어야 했던 것이다.
“야, 나영아. 이것도 우리의 전생이라면 다음 생에서 우리는 무얼까?”
“모르겠어.”
“나도. 그때 보자.”
연인의 인연을 종식하고 친구로서 헤어지는 순간 해성은 12살 때 그랬던 것처럼 나영을 부르고 나영은 12살 때 그랬던 것처럼 해성의 부름에 답한다. 그 시절의 서로를 마지막으로 소환한 두 사람은 이것을 끝으로 어린 해성과 나영을 영원히 떠나보낸다. 수 천 겹의 인연으로 한 점에서 잠시 만날 수 있었던 이들의 현생은 다시 이렇게 수 천 겹의 전생으로 회귀한다. 이렇게 인연의 수레바퀴는 두 사람의 전생을 휘감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