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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Aug 04. 2023

2. 반말마녀

K는 명예퇴직을 한다는 사실을 극소수의 교사들에게만 알렸지만 역시 학교는 입보다 빠른 손이 있는 곳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교사들은 업무를 위해 반드시 하루 종일 내부 메신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 삼삼오오 만나서 가십과 비밀(혹은 뒷담)을 주고받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안전하고 은밀하게 크고 작은 가십들을 삽시간에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러겠지만) 부쩍 후배교사들의 다정한 인사가 늘었고 그렇게 여러 교사들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K는 태연한 척 미소로 응답하며 고맙다고는 했으나 실은 편치만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저렇게들 아쉬워하지. 그래. 아쉬워해 줄 때 떠나는 게 맞아. K는 동료들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결정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으려고 노력했다. K 본인은 왜 아쉽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해본 일이라고는 학교안팎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던 K였다. 게다가 50대에 제2의 인생에 도전하겠다는 것은 용감하기로 정평이 난 K에게도 두려운 도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과의 수업. 남은 열정을 수업에 쏟아붓고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누군가 K가 있는 교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컥. 그렇지. 그녀지. 여전히 남의 교무실에 노크 없이 들어오는 그분. 교무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솔’ 음의 피치로 K의 ‘이름’을 부르며 스윽 들어오는 그분. 아니 왜 그분은 이렇게 K와의 인연이 질긴 걸까. 애당초 이런 만남에 인연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맞기는 한 건지. K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분에게 반가운 양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솔’ 음을 내장한 거침없는 그분이 되겠다.



25년의 교직 생활을 통틀어 K에게 초반의 5년만큼 힘든 시기가 있었을까. 예상치 못한 합격에 얼떨결에 교사의 길로 접어든 후, 학교라는 사회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여기저기에서 숱한 암초를 만났다. 익숙지 않은 업무, 돌발 행동을 하는 아이들, 빡빡한 일정 등. 그러나 그녀에게 가장 큰 시련을 맞보게 했던 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던 암초, 바로 교사들이었다.


학교가 회사처럼 철저하게 부서 중심으로 업무가 진행된 다는 것은 학교 내부에 들어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갓 임용되어 한 부서로 배정된 K에게도 여러 업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업무에 더해, 그녀는 신규라는 이유만으로 부서의 총무를 떠맡게 되었는데, 말이 총무지 사실 주 업무는 유난히 거창하고 잦았던 그 부서의 회식을 총괄하는 일이었다. 신규에게 총무를. 하. 지금 생각해 봐도 신규에게 총무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회식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부장님이 회식 일정을 확정해서 K에게 알려주면, 그 지역을 전혀 모르는 K는 인터넷을 뒤지고 그 지역을 아는 분들께 물어물어 회식 장소를 알아본 후 예약을 잡았다. 그렇게 예약을 하고 회식 당일이 되면 회식은 1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차, 3차까지 이어지기 일쑤였고, K는 총무라는 이유만으로 회식의 모든 단계에서 본인의 카드로 결제를 한 후 나중에 부원에 들에게 1/N로 돈을 받는 구조였다. 게다가 K는 재직 학교와 다른 지역에 살았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회식이 잡힌 날에는 언제나 택시를 불러서 집에 가야만 했다. 당연히 택시비는 본인 부담이었다.


K가 애당초 총무를 어떻게 맡게 된 걸까? 바로 ‘솔’ 음의 그분 덕분이었다. 학기 초 부서 회의에서 총무를 누가 맡을지 거론되자마자 그분은 K를 보며 “신규가 해야지, 뭘 정해. OOO 니가 그냥 해.”라는 말을 던졌고, 아무것도 모르는 K는 그저 받아들였던 것이다(다른 부원들의 침묵 역시 지적하고 싶다). 회식으로 인해 자신이 받을 고통을 예상했더라면 K가 선뜻 받아들였을까. 자신이 도와줄 거니까 걱정 말라고 했지만, 정작 회식 때마다 K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었다.


집이 멀어서 1차까지 참석하고 가겠다고 하면 “요즘 신규들은 참 좋겠다, 지 맘대로 할 수 있어서”라는 말로 비아냥 대기 일쑤였고, 술을 못 마시니 그냥 음료수로 건배를 하겠다고 하면(그때는 왜 그렇게 건배에 집착들을 했던 걸까) “어머 쟤봐. 신규가 술을 안 마시네”라는 말을 시작으로 모든 부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규가 술을 안 마신대요. 샘도 신규 때 그랬어요?”라고 하는 통에 K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맥주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만 했다. 그것뿐인가. 회식이 끝나면 바로 주겠다던 회비는 다음 회식 때 같이 준다며 주지 않아 K는 자신이 감당할 필요가 없는 카드값을 본인 돈으로 먼저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뒤늦게 주면서도 사과보다는 ‘당당하게’ 같은 교무실에서 일하는데 내가 돈을 떼먹겠냐는 주옥같은 멘트를 남겼음은 물론이었다.

 

이렇게 K에게 교직의 문턱을 넘자마자 기억하기도 싫은 시간을 선사했던 그분이 지금 K의 눈앞에 서있었다. 명예퇴직 소식을 듣고 인사차 들렸다고 하면서 자기는 정년퇴직을 할 건데 왜 이렇게 빨리 그만두려 하냐고 묻는다. K는 잠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이 분을 한 번 자극해 볼까 하는 충동과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만 지워내는 신비한 기술의 비법을 물어보고 싶은 욕망사이에서 갈등하며. 신규 때 봤던 모습보다는 세월이 많이 쌓인 모습이었지만, 그분의 말투와 목소리는 어째 세월도 비껴간 것만 같았다. 그래.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예전 기억은 잊자. 그냥 나를 위해 웃으며 이분과 대화를 해보자. K는 마지막이 될 학교에서 먼지 낀 과거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고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응대를 하며 그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그렇다. 그런데…로 이어질 타이밍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그분은 K에게 폭탄을 던졌다. 아. 잊고 있었다. 이래서 이분이 마녀였는데.


“OOO, 그런데 왜 결혼 안 해? 예전에 애인 있다고 안 했나? 괜찮아. 요즘은 60 넘어도 젊으니까 앞으로 좋은 사람 생길 거야. 그때 가서 결혼하면 되지 뭐. 참, 우리 애는 이제 대학교 졸업해.”


K는 자신의 소중한 공강 시간을 ‘솔’ 음의 그분에게 내주려고 했던 자신의 경솔한 결정에 후회막급이었다. 아, 저런 태도, 저런 말투. 둘의 나이가 합쳐서 100살이 넘는 데도 여전히 K를 반말로 불러 젖히는 저 엄청난 매너. 나에 대한 공격과 자식에 대한 자랑을 부드럽게 이어가는 저 유려한 화술. 자녀의 대학 졸업을 쓴웃음과 빈말로 축하해 주며 그분을 바라보고 있자니 K의 눈앞에 오래전 그분의 여러 모습이 겹겹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솔’ 음의 그분과 하도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K는 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K가 절대 안 하는 일, 정말 싫어하는 일, 즉 빈말이라도 그분을 무조건적으로 칭찬만 해드리는 자는 전략을 사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분은 사실 유난히 화려한 원피스나 스카프를 좋아했기에 평소에도 드러내놓고 남들에게 칭찬을 유도했었다. 물론, 자기와 전혀 맞지 않는 취향의 패션을 보며 K는 구태여 거짓으로 칭찬하고 싶지 않아 그럴 때마다 살며시 그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예의 그 패션으로 출근하는 그분에게 K는 열띤 어조로 패턴이 너무 세련됐다고 너무 잘 어울리신다고 말을 건넸다. 그런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분은 “OOO, 니가 보는 눈이 있네. 내가 처녀 때 강남 살았잖아. 나 강남 아가씨였어. 그 감각이 어디 가겠어? 호호호. 고맙다, 얘”라고 받아치는 것이 아닌가. K는 그녀가 받아쳐 다시 날아온 말에 맞아 거의 실신할 뻔했다. 자신이 너무 싫어져서였다. 그날 그분은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K에게 유난히 상냥하게 대했지만, K가 자괴감이 들면서까지 던진 칭찬의 약발은 이틀을 가지 못했고, 그날 이후 K는 그분과 평화롭게 지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분은 새 옷을 입고 올 때마다 K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무언가 기다리는 눈빛을 쏘아 대긴 했지만.


그분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려 댔고 덕분에 K는 현재로 돌아왔다. 에휴. 이제 공강이 15분도 안 남았네. 고맙게도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주었구나. 그분은 급하게 K에게 인사를 던지고 교무실밖으로 사라졌다. 그분이 앉아있던 의자를 바라보며 그분이 굳이 찾아와서 내뱉은 말을 떠올리자니 K는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저분은 변한 게 없구나.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았네. 나는 어떨까. 나도 변한 게 없을까? 변한 게 있다면 무엇이 변했을까? 20년을 돌아서 만난 ‘솔’ 음의 그분 덕분에 명예퇴직에 앞서 자신을 또 한 번 성찰하게 되었으니 감사하게 성찰의 기회를 준 그분을 이제 그만 마녀반열에서 내려드려야 할까.

그 이후 K는 그분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분을 향한 인사에 그래 뭐. 그렇게 사십시오라는 마음을 담아.



☞ 당신을 위한 팁! 이런 마녀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이 유형의 마녀들은 기본값으로 안하무인, 아전인수가 세팅되어 있다. 지극히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옳고 모든 판단은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만난다면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왜 이렇게 함부로 하는 걸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은 모르지만 전형적인 꼰대 유형에 속한다. 나이로 계급을 정한 뒤 계급에 맞춰 행동하려 한다. 이들이 멋대로 정한 비합리적이고 구태의연한 규칙에 우리가 휘말려서는 안 된다. 이들의 무례함, 촌스러움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공식적인 모든 장소에서 이들에게 극존칭과 함께 최상의 예의를 보여라. 이것은 주변에 당신의 품격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가급적 사적인 대화의 기회는 피하라. 당신의 정신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K처럼 어설프게 칭찬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 이런 유형은 칭찬에 목말라하지만, 계속된 칭찬에는 또 쉽게 싫증을 낸다. 당신은 격이 전혀 다른 차원에 있으니, 이런 사람과 같은 차원에 절대 머물지 말라. 왜 그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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