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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un 06. 2023

1. 음식마녀

K는 내년 2월에 25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교직에서 완전히 떠난다. 명예퇴직을 기다리자니 순번이 오려면 한참이고, 정년퇴직까지는 아직 몇 년이 남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힘이 남아있는 지금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적기라고 생각해왔고, 운이 좋게 몇 년 전 작가로 데뷔하며 구체적으로 퇴직 계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K가 교사가 된 것은 순전히 부모님의 권유였지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그녀의 장래 희망 리스트에는 첫 번째는 아니어도 늘 중간쯤 어딘가에 애매하게 교사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사가 되고 얼마지 않아, K는 교사가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들이 써준 수많은 편지와 메모들이 가득하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나는 그들은 이제 대부분 성인이 되었고, 많은 아이들이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기도 했다. 서랍을 뒤지다 보니 한쪽에 묶어둔 사진 뭉치가 보인다. 이런. K의 입에서는 절로 끙 소리가 나온다. 해마다 찍었던 교직원 사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 몇몇 얼굴에서 오래전 묻어버린 기억들이 소환된다. 참. 이 사람들이 있었지. 

K는 그들 덕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햇병아리 같던 신규 때부터 어디에선가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던 그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이 시점에 다시 한번 나타난 그들. 이제 K는 자세를 고쳐 잡고 사진을 더욱 자세히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이 또렷하다. 아니, 그들이 한 짓들이 생생하다. 마치 어제 일처럼.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K는 아직도 첫 출근의 새벽이 생생하다. 몹시 피곤하고 분주했던 그 날 아침. 새벽 5시가 채 되기도 전에 이미 집안은 환하게 밝혀진 상태였고, 그녀보다 더 들뜬 부모님은 이것 저것 K의 준비상태를 점검하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계셨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그녀만은 첫 출근의 부담으로 간밤에 잠을 설쳐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게다가 곱게 개어서 침대 위에 놓여있는 ‘교사 복장’은 그녀의 피곤함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어떻게 먹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비몽사몽 아침을 해치우고 아버지의 차를 타고 출근하던 그날, 그녀는 벌써 교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울고 싶었다. 휴… 내가 교사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평생 자유롭게 살다가 갑자기 틀에 박힌 일상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매일 새벽에 일어날 수는 있을까? 무엇보다 나의 반항정신은 어떻게 하지? 공무원이 나의 적성에 맞기는 할까? 4-50분이 소요되는 출근길 내내 그녀는 아주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몇 번이나 차문을 열고 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교사생활은 그녀의 우려대로 순탄하지 못했다. 교사가 되기 전에도 학원 등에서 이미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과목에 대한 정보전달 능력과 학생 지도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고, 무엇보다 학교라는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일은 모든 순간 그녀를 힘들게 했다. 복사기 사용 같은 간단한 일에서부터 공문을 처리하는 복잡한 일까지 그녀는 정신 없이 헤매기 일쑤였고, 놀랍게도 학교에는 신규교사에게 이런 일들을 가르쳐주는 시스템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매번 부딪혀서 실수를 하고 나서야 실수를 통해 스스로 배워나가는 구조였고, 그마저도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극복하고 나서야 배움이 찾아왔다. 게다가 담임교사로서의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고달픔이었다. 당시 40명이 넘는 학급의 아이들은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 모든 아이들을 상담하고 입시를 지도해야하는 일은 절대 녹녹하지 않았다. 신규교사였던 K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로서의 자긍심이나 교육자로서의 철학은 신규교사에게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나마 그녀가 기댈 곳은 동료 혹은 선배 교사들뿐이었지만, 학교라는 곳의 특성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교사들은 과목지도나 담임 업무 이외에도 자신이 해야 할 업무를 따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고(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동료의 불행이나 어려움은 특별하게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한 나의 일이 아닌 분위기였다. 그러니 K에게는 하루하루가 첩첩산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첩첩산중에 어느 날 홀연히 마녀 한 분이 등장했다. K가 그렇게 힘든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마녀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분이지만 그때의 K에게는 마녀가 되고도 남음 직한 사악함을 지니셨던 그분.



그녀는 같은 교무실에 근무하던 교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K보다 한두 살 정도밖에는 많지 않았다. K와 마주 앉아있던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평범한 사람이었고, 처음 한두 달은 그럭저럭 K와 별 탈 없이 지냈다. 그러던 그녀와 사건이 생긴 건 순전히 아이들이 던진 의미 없는 말 한두 마디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녀의 본색을 드러내던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K는 교무실에서 업무에 파묻혀 주변에 있던 교사들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서 이리저리 자료를 뒤져보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마침 여학생 몇 명이 앞자리의 마녀에게 다가갔고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K는 그때까지 마녀의 나이를 모르고 있었고, 다만 꽤 경력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전형적인 ‘교사다운’ 복장의 마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것이며, 본인보다는 한참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마녀와 놀다 앞자리의 K를 발견하고는 새로 오신 젊은 샘이라고 부르며 인사를 했다. 별 뜻 없이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다시 업무를 하고 있던 K에게 앞자리 마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 샘이랑 나랑 나이 비슷해. 니들 몰랐구나”. 아이들은 에이 하면서 마녀의 말을 농담으로 흘려 넘겼지만 안 듣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K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정말일까? 정말 저 사람이랑 나랑 비슷한 나이일까? 앞서도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간 후 마녀는 K에게 자신의 학번을 말하며 또래임을 강조했고 K는 그저 그러시군요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앞자리의 교사는 본격적으로 마녀가 되기 시작했다. 


우선 마녀는 공개적으로 K의 나이를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해서 회식차 노래방을 가면 마이크 한 개는 본인이 독차지하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노래방이 떠나가라 노래를 불러제끼는 그 목청으로 K의 나이를 노래처럼 읊고 다녔다. “저 샘, 보기보다 어리지 않아요”라고. 한번은 예전 가요를 흥얼거리다가 K에게 제목을 아느냐고 물었고, 가요를 잘 듣지 않았던 K가 모른다고 하자 “모른척 한다고 그 시대 사람이 아닌 건 아니지, 샘”이라며 K를 어이없게 만들기도 했다. 마녀의 테러는 나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 옷 입기를 좋아했던 K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완전 예전 스타일이라며 언제 산 옷이냐고 ‘공개적’으로 떠드는가 하면, K의 귀걸이나 반지 등 온갖 액세서리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더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그렇게 K의 패션에 대해서 비난하다가도 어느 날에는 K의 귀걸이와 아주 비슷한 귀걸이(훨씬 저렴한)를 슬그머니 차고 오기도 했다. 물론 K는 모르는 척하며 칭찬을 해주기는 했지만. 


마녀가 괜히 마녀겠는가. 오죽하면 25년이 지난 다음에도 K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할까. K는 사진을 보며 그 마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기를 바랬지만 오히려 지우려고 애쓸수록 온갖 기억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마녀의 얼굴, 옷차림, 말투에 그녀가 뿌리고 다니던 향수의 향기까지 이제는 본격적으로 K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떠올릴 수 밖에.


그 마녀의 악행은 나이나 외모, 차림새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지적, 조롱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마녀가 무슨 자격으로 조롱했는지는 의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K는 당시 신규였고 업무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다. 따라서 같은 부서의 누구라도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 입장이었고, 부서의 부장 교사나 주변 교사들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었으나, 불행하게도 K는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도움 대신에 비난을 자주 해주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이 마녀였다. 난생처음 다뤄보는 공문작성과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저질렀던 크고 작은 K의 실수는 곧바로 그 마녀의 먹잇감이 되었고 자신의 실수와 마녀의 힐난에 K는 너덜거리는 마음으로 업무와의 전쟁을 매일같이 치러야만 했다. 게다가 신규교사를 돕지 않는다고 부장 교사에게 질책이라도 받는 날이면 마녀의 눈에서는 말 그대로 레이저가 쏟아졌다. K는 차라리 부장 교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기도할 지경이었다. 정말 숨 막히는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정말 황당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 마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날도 K는 난생처음 해보는 업무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슨 이유였는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업무를 빨리 끝내야만 했던 K는 난감하고 초조했다. 넓은 교무실의 이쪽저쪽을 살피던 그때, K의 건너편 바로 마녀의 자리에 마녀의 뒷모습, 정확히 말하면 뒤통수가 보였다. 뭐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뒤통수만 보이고 앉아있던 마녀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진 K는 까치발을 하고 마녀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마녀를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마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마녀는 락앤락에 싸 온 왕새우 튀김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먹고 있는 중이었다! K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순간, 그간 마녀에게 받은 비난과 조롱, 말도 안 되는 신상 공개와 공격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어지는 느낌이었다. 뭐야.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한테 내가 그동안 시달린 거야?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하. 게다가 K는 새우튀김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입 먹겠냐고 물어봤어도 본인에게 손해날 것은 전혀 없었을 텐데. K는 그렇게 숨 숙이며 먹는 마녀를 못 본 척 살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씁쓸한 미소를 띤 채. 


이상한 것은 그날 이후 그 마녀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으로 유난히 자주 K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K가 목격을 당했다는 표현이 마땅하다. 보고싶지 않은 장면을 자꾸만 보게 된 K가 피해를 당한 것이니. 한번은 우연히 다른 교사들과 찾아간 스파게티 맛집에서도 안쪽에서 하얀 면을 끝없이 흡입하며 홀로 앉아있던 마녀를 발견했고(그 끝없이 빨려 들어가던 면이란!), 그 이외에도 교사 식당 등에서 그녀의 인간을 뛰어넘는 식탐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그렇게 그 마녀는 음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완성하며 마녀의 자리에 당당하게 올라섰다. 그리고 K는 마녀와 얽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마녀가 먹던 숨 막히던 새우튀김의 순간 덕분에 마녀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습지 않은가. 식탐도 이기지 못하는 겨우 저런 마녀라니 말이다.


☞ 당신을 위한 팁! 이런 마녀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이 유형의 마녀들은 기본적으로 남을 내리누르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칭찬에 몹시 취약하다. 또한 음식이나 선물, 칭찬 등에는 자제력을 잃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렇게만 하면 이들과 맞서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1.     당신을 왜 누를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그들보다 높이 있는 사람이기에(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당신을 눌러서 자신이 있는 아래쪽으로 끌어 내려야만 간신히 당신을 상대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만나면 당신의 마음가짐을 바꿔서 관대해져라. 당신은 충분히 고귀하고 훨씬 여유로운 사람이니까.

2.     그들의 비난을 듣기만 해야 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마녀들에게 당신에 대해서 비난할 기회를 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들의 자만심과 허세를 충족시켜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한 두 마디 세게 대꾸해줄 필요는 있다. 그들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신호는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피곤해 질 수 있으니 너무 길게 너무 자주 대꾸하거나 상대하지는 않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일로도 충분히 피곤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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