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리 May 29. 2016

나를 사랑한다뇨, 그럴 리가

#
술을 좀 마신 날에는 자기 전에 꼭 라면을 먹고 자는 습관이 있다. 새벽 두시에도 세시에도 먹는다. 다음날 일어나 보면 입천장이 다 까져있다. 호로록 신나게 먹을 땐 몰랐는데, 꼭 그렇다.

#
지난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일기를 많이 썼다. 당연히 술도 많이 마시고 울기도 많이 울고 수다도 많이 떨었지만, 일기를, 제일 많이 썼다.

일기장을 부여안고 나는 자책을 많이 했다. 내 20대의 모든 연애는 실패했다. 결론은 늘 하나의 물음으로 향했다.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을까? 그러면 다시 썼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려고는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떳떳한,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성품으로만 사람을 차별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간혹 외모로도 차별한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한테 더 잘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콜센터 직원에게 신경질 낼 때도 있다. 뒷담화따위 하지 않는 고고한 생을 살고 싶지만 개똥이다. 이러면 안 돼. 더 좋은 사람이 되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
그런 강박으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내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바보인가. 그것은 상관관계일 수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아니다.

역시 그랬다. 좋은 사람이려 노력해도 어마무지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삶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열심히 일했지만 특종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편집인상을 받지 못했고 이달의 기자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었지만 가까워지기는 쉽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가끔 콜센터에 짜증을 냈고 뒷담화도 조금 했다. 공공예절을 지키려 애쓰는 것으로 반까이하려 했지만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
아침에 일어나니 입천장이 다 까져 있었다. 천천히 혀로 입 안을 훑어 골고루 쓰라림을 느끼며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럴 수가 있나? 술처먹고 컵라면을 급히 먹다가 입천장을 박살내는, 그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입천장을 고루 훑으면서도 이불킥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홍삼을 마시는 나를 보며 알게됐다.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 속에서도 어찌됐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덕에, 그 덕에, 적어도 내가 나를 미워하지는 않게 됐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 미치겠지 않다.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어찌됐든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끝까지 나와 함께할 사람은 나뿐이니까, 어떻게든 등 두드려주고 예뻐해주려고 애쓰는 것일 뿐이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눈물을 앙 참고 입술을 꽉 깨물며.

내게도 기적처럼, 기쁘고 행복한 일이 일어날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때가 왔을 때 스스로에게 "수고했어 그동안. 이 상은 받아도 돼. 너는 자격이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딱 거기까지만 하고 싶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됐다. 언제나처럼 창피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엄마는 여하간, 그렇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