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리 Feb 12. 2022

사무치게 회사에 가고 싶던 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함께 갈려 들어간 것들

아이를 낳기 전 SNS에서 다른 사람들의 육아기를 읽으며 매번 감탄했던 지점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복직을 준비하며 그 이후의 커리어를 촘촘히 설계하는 이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일을 했지만 내게 일은 여전히 버겁고 힘들었다. 한낮의 모래사장을 걷는 것 같았다. 시원한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때때로 반짝이는 조개와 아름다운 모래성을 발견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발바닥은 언제나 뜨거웠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열심이었다. 밥값을 하는 일만큼 숭고한 게 어디 있으랴. 하지만 회사에 다니며 '와, 나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 난 이걸 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글쎄, 얼마나 있었을까. 있기는 했을까. 마음을 울렁이는 조개껍데기를 줍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 자신의 일터를 깊이 그리워한다니. 놀라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이들조차 그랬다. 물론 나 역시 육아휴직 후 복직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지만, 말 그대로 삶의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였을 뿐 남들처럼 들끓는 열망으로 복직을 꿈꾸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나만 빼고 다들 꿈의 직장에 다니고 있는 거였어? 은근한 열패감이 목에 엉기어 차올랐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와 밤중 수유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하던 어느 새벽. 사무치게 회사에 가고 싶었다. 왜 그제야 알았을까. 돈이나 자아실현, 성공이라는 화려한 단어와 닿아있지 않더라도 일하고 싶은 마음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이 함께 갈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일하고 싶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거실 매트가 아닌 바퀴 의자에 착석하고 싶어.

일하고 싶어.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세상 쓸데없는 농담을 하다가도 회사의 미래는 마치 우리 손에 달린 듯 한숨을 쉬고 싶어.

일하고 싶어.

엉덩이가 아작날 것 같을 때 카톡 투명창으로 선배에게 말을 걸어 화장실에 가는 척 3분 차이로 일어선 다음 엘베 앞에서 만나 커피숍으로 후다닥 튀어가고 싶어.

일하고 싶어.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며 혼자서만 부글부글 속을 끓이다가 같은 온도로 부글부글 중인 동료와 끓는점이 통해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어. 모든 문이 열려 있는지, 똥 싸는 영혼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시원하게 욕을 하고 싶어. "정말이지 싫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일하고 싶어.

밤늦도록 고민해서 내놓은 꽤 괜찮은 결과물로 어린아이처럼 칭찬받고 싶어. 여전히 내 머리가 영업 중이란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일하고 싶어.

부장이 골치 아픈 일거리를 들고 와 '이거 할 사람 너밖에 없다'고 할 때 폭풍 짜증이 일다가도 '그래 역시 나밖에 없지'라는 우쭐한 마음으로 받아 들고 싶어.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답을 내놓고선 "역시!"라는 짧은 음절의 청량함에 취하고 싶어.

일하고 싶어.

후배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가가 꼰대는 절대 아닌 척하며 온갖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 누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헛일한 게 아니구나'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

일하고 싶어.

야근이 끝나고 맥주 한 잔 하고 가자는 부장 말에 속으로는 '아싸 맥주' 하면서도, 있던 약속 미루는 척하고 따라나서고 싶어.

일하고 싶어.

내일 나갈 때 입을 옷을 고민하고 싶어. 보드랍게 늘어진 면티샤츠가 아닌 까슬거리고 타이트한 니트 원피스를 말이야. '옷장에 옷이 없네' 푸념하면서도 입고 나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잠들고 싶어.




이렇게 많은 마음들을 두고 어째서 나는 일을, 자아실현의 욕망하고만 연결 지어 생각했을까. 그러니 그토록 힘들었는지도 몰랐다. 토마토케첩은 100% 토마토가 아니다. 토마토는 별로여도 감튀는 케첩이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마음이 있었다.


일하고 싶어.

그래서 아이에게만 매달리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어. 나라는 비루한 인간은, 아이만 바라보다 너무 큰 기대를 품을지도 몰라. 기대는 아이를 옥죄게 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어.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 잠은 아이가 자는데 꿈은 내가 꾼다.

일을 하고 싶다고,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매거진의 이전글 어쨌든 만삭, 어느덧 만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