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 들어왔다.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속이 울렁거려서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먹으면 여지없이 구토가 시작됐다. 하루 종일 어지럽고 나른했다. 누워있어도 힘든 날들의 반복이었다. 머릿속에선 라면, 떡볶이, 햄버거, 치킨, 케이크 같은 것들만 빙빙 돌았다. 짜장면과 곱창을 상상하며 잠을 청했다. 시원한 생맥주 한 잔만 마시면 살 것 같았다.
임신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꿈에도 몰랐다.
지독한 입덧이었다.
어느 날엔 일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처음 겪는 몸의 변화가 낯설고 힘들어 나도 모르게 터진 울음이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답답함도 컸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라도 떨면 조금 나았을 텐데, 가끔 메시지를 나누고 전화를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배의 깊은 배려로 거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큰 위로가 됐다. 임산부 배지를 코앞에 들이밀어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째려보며 버스를 타는 일이 줄었고, 회사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토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무기력함이었다. 책은 한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오고 심지어 드라마에도 집중이 안 됐다. 페이스북을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이 똑똑했고, 인스타그램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모든 사람이 즐겁고 화려하게 살고 있었다. 그걸 끄고 누워서 본다는 게 유튜브 먹방이었다. 잠들 때쯤엔 자괴감이 들었다. '난 점점 멍청해지고 있어. 진짜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아아, 그 너저분한 느낌. 울고 싶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겨우 마감을 하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 걸 뭐. 무기력하고 무기력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덧이 끝나고 이른바 '안정기'라는 것이 내게도 찾아왔다.
식욕이 폭발했다. 철분은 공복에 먹으라는데 내겐 공복이 없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친구들은 무항생제 소고기를 찾아 먹고, 빵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는 안 먹었다던데 나는... 그냥 허접한 인간이었다. 라면과 햄버거와 아이스크림 앞이라면 허접해도 좋았다. 얼마나 많은 밤을 먹방과 함께 했던가! 평소라면 남편과 사이좋게 나눠먹었을 치킨 한 마리가 턱없이 작게 느껴졌다. 남편을 밀어내며 본능적으로 빨리 먹었다. 그는 눈치를 보느라 치킨무도 먹지 못했다.
그냥 반 마리를 더 시킬 걸, 왜 그랬을까. 연애 시절 예쁜 척을 해댔던 나 자신이 가소로웠다. 그때도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푸드 드링커'라고 놀릴 정도로 음식을 흡입하곤 했지만, 적어도 휴지로 입을 닦아가며 먹던 시절이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복병은 '튼살크림'이었다. 미끌미끌한 느낌을 매우 싫어하는 나에게 '촉촉'을 넘어 '축축'하기까지 한 튼살크림을 바르는 일은 고역이었다. 친구들은 그래도 이 시기가 가장 낫다며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수영할 때 "힘 빼, 힘 좀 빼라고!" 하면 온몸에 더 힘이 들어가 가라앉는 것처럼 '즐겨야 해,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튼살크림이 더욱 미끄러웠다. 손을 너무 씻은 탓에 스마트폰 지문 인식이 빠르게 되지 않았다.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자 배가 마구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좀 더 먹어볼까?'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맛집 한 번 제대로 못 가보고 만삭이 됐다. 지금은 정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배가 너무 무거워져서 뒤뚱뒤뚱 걷는다. 집안에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다. 임산부 요가? 됐다 그래라. 하루 종일 손발이 팅팅 부어서 누워있는 것도 괴롭다. 가벼운 임신 소양증도 찾아왔다. 임신한 이후로 지금까지 푹 자본 적이 없다. 가장 힘든 것은 등과 허리가 너무너무 아프단 사실이다. 온몸의 살을 모아 당겨 배로 끌어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얼마 전에는 기어이 또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너무 아프다고!"
물론 임신하고 좋았던 것들도 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배에 힘을 주지 않고 다녀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말이죠, 제 배가 아니라 아가라니까요 아가."
마음껏 먹고도 배를 마음껏 내밀었다. 그게 이토록 편할 줄은 정말 몰랐다. 평소에 내가 배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단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셔츠나 원피스를 입기 위해 항상 긴장한 채로 다녔던 거다. 당황스러웠다. 난 왜 그렇게 힘을 주고 다녔던가. 그것은 사회의 억압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스스로를 억압했던 걸까. 이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가 훅훅 나오기 시작하면서 등허리가 뽀사질 것 같았으니까.
몸의 고통에 비하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결혼도 임신도 비교적 늦었기에 오히려 갖게 된 여유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엄청나게 우울할 법한데 아주 크게 우울하진 않았다. 남편이 "아가야, 엄마 좀 그만 괴롭혀"라고 말하면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며 이렇게 말할 넉넉함마저 있었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지금 얘도 크느라 힘들단 말이야."
와, 이런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다니. 내 입이 해낸 일이라니. 엄청난 모성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여자의 모성애는 타고난다는 말, 질색이다. 내가 매우 이타적인 인간일 리도 없다. 그냥,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가 아가한테 뭘 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초대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평온했던 마음도 출산이 다가오면서 와락와락 흔들리고 있다. 무지하게 무섭고 떨린다. '남들도 다 하는 일이야.' 이런 위로는 별 소용이 없다. 그 순간만큼은 그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하다'는 말은 죄송한데 하지 말아 주세요. 다가올 육아 생활이 이미 충분히 두렵습니다. 덜덜덜.
또 상상을 한다.
'출산만 해봐라, 회전초밥집 가서 스시 미친 듯이 먹어야지. 생맥주 한 잔 캬- 죽이는 맛이겠군. 아, 양꼬치에 고량주도!'
역시 먹을 걸 상상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
아, 나도 안다. 출산만큼 힘들다는 모유 수유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애써 떠올리지 않으련다. 미안하다 아가야. 안 되면 분유 먹자. 나도 분유 먹고 컸다. 엄마 키(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