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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리 Aug 18. 2022

우리는 사소함 덕분에 살아남게 될 거야

삶이 추운 날,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연료에 대하여

아빠가 야근하는 날엔 꽤 신이 났다. 엄마랑 동생 손을 잡고 동네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었기 때문이다. 가게 이름이 장터국수였던가. 돈가스를 시키면 ‘사라다’에 콘샐러드가 듬뿍 얹어져 나오는 집이었다. 배불리 먹고 맞은편 희망서점에 들러 책을 사면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이었다. 아빠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아빠가 야근하는 날이 좋았다.


부산에 잠시 살던 시절, 주말마다 허심청이라는 온천에 갔다. 어린 내 눈에는 온천이라기보다는 테마파크와 같은 곳이었다. 엄마가 아직 아기였던 막내를 씻기고 있으면 동생과 나는 온천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인피니티풀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물에서 개구리헤엄을 치며 우리는 즐거웠다. 목욕을 마치면 롯데리아에서 꼭 불고기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집밥을 고수하는 아빠도 좋아했던 버거, 밥을 하지 않아 행복했던 엄마가 좋아했던 버거, 동생과 나는 그저 맛있어서 좋아했던 버거. 불고기버거 세트로 우리의 주말은 자랐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독서실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날이 많았다. 자정께 나오면 항상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서실에서 집으로 가는 15분.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선생님 진짜 변태 같아, 걔 진짜 웃기지 않아? 엄마는 예외 없이 내 편이었다.


수능일이 훌쩍 지나 직장인이 된 내겐 저녁 약속이 많았다. 맛집에 가면 열 살도 더 어린, 한참 잘 먹는 막내 생각이 많이 났다. 피자 한 조각, 단팥빵 한 봉다리를 꼭 손에 쥐고 귀가한 나는 참된 누나였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소설 <작은 아씨들>을 읽은 건 초등학생 때였다. 예쁜 삽화에 넋이 나가 몇 번이고 읽었지만 그땐 이 소설이 얼마나 깊이 있고 따뜻한 작품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영화로 다시 만난 ‘작은 아씨들(2019, 그레타 거윅 감독)은 기대 이상으로 울림이 있었다. 네 자매의 우애, 이웃 간 따뜻한 우정이 영화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달까.


이야기는 시대의 한계, 여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작가가 되려는 둘째 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고민 많은 조에게 막냇동생 에이미가 용기를 북돋는 씬이다.


“가족이 티격태격하고 웃고 하는 얘기를 누가 읽겠어. 중요할 것도 없는데.” (조)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에이미)


영화 '작은 아씨들'


팬데믹이 덮친 이후 글을 쓰는 일이 두려웠다. 중요한 뉴스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세상에서 내 일상은,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너무 사소하고 미천했다.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소한 얘길 누가 본다고,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나 에이미가 맞았다.


사람들에 치이고 일에 시달린 날들에 나를 위로해준 것은 폭풍 같은 격언이나 화려한 수사가 아니었다. 아빠가 야근하는 날의 돈가스, 구멍가게 같던 서점에서 신나게 책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따뜻한 목욕을 끝내고 온 가족이 먹던 불고기버거였다. 엄마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던 짧은 길이었다.


엄마와 나는 그 길을 몇 번이나 걸었을까. 우리는 그 길에서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까. 그런 건 알 수 없다. 그저 그 밤, 그 길, 엄마의 따뜻한 손. 그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랬지. 삶이 추운 날,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연료는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지. 시시하다 치부하니 시시하게 보였던, 그 모든 느슨하고 사소한 기억들이 나의 연료였다.




아이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에 대해 남편과 수다를 떤 적이 있다. -힘든 일도 혼자 헤쳐 나갈 수 있는 단단한 멘탈! 일단 영어만큼은 좀 자유롭게 해야 하는 거 아냐?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지. 에이, 그렇게 치면 부동산 아니겠어?- 우리는, 우리도 갖지 못한 것들을 주겠다고 하하호호 까불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수다를 멈췄다.


-우리, 가족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자. 예를 들면? 음... 눈 오는 날 집 앞에서 썰매 타는 거? 그런 건 할 수 있잖아. 작고, 사소하니까.-


그런 사소한 일들을 아이가 좋아할까. 나는 언젠가 막내가 보내온 메시지를 떠올렸다. 커피를 마시다 문득 내 생각이 났다며 동생은 말했다. “누나가 나 어릴 때,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오면 꼭 싸왔던 게 생각이 나서.”


나의 사소함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니 작고 시시한 일들에 깔깔 더 크게 웃어야겠다. 맛있는 게 있으면 꼭 집에 싸가야지. 돈가스와 불고기버거의 목록을 더 길게 늘려 가야겠다. 아이가 웃는 순간을 기억해야겠다. 보드라운 볼에 더 많이 뽀뽀해줘야지. 아이를 재운 후 남편과 치맥을 먹으며 넷플릭스 보는 시간을 더 사랑할 거야. 청소는 조금만 해야지. 대신 일기를 많이 써야겠다.


우리는 사소함 덕분에 살아가게 될 테니까. 사소함으로, 살아남게 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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