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영주 편]

활보하는 사상을 여행하다

by 이영



















집에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친형이 내 방으로 와서 나에게 묻는다.


"야, 너 영주 가봤어?"

"당연하지 나 새내기였을 때 첫 답사지였어"

"나는 '영주'라는 도시가 있는지도 몰랐어"


?! 영주를 모른다고? 모든 건축가들과 미술평론가들, 그리고 역사가들이 뽑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찰 부석사가 있고,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이 있는 그 유서 깊은 명맥의 도시를 모른다고? 그렇다면 형은 갑자기 무슨 일로 영주를 알게 됐는지 물어보니 쯔양이 영주를 다녀와서 먹은 길거리 떡볶이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다고 해서 나보고 같이 영주를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다. 떡볶이만 먹으면 그 다음 일정은 내가 알아서 짜는 대로 따라가겠다는 말에 흔쾌히 가이드 제안을 받아드린다. 이 어리석은 중생에게 영주의 품위를 알려주러.



제민루과 삼판서 고택

영주 365시장 근처 노점판매를 하고 있는 영주의 명물 '영주랜떡 떡볶이'를 먹고 근처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를 걷다가 관광홍보센터가 있어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략적인 여행일정과 시간대를 계산해본다. 안내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가 원래는 '후생시장'이란 이름으로 과거 일제강점기 때 영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주역과 영주시청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상권이 이동했고 후생시장은 방치되다시피하다가 최근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오백빵집'이라고 유서깊은 빵집도 있다고 한다. 떡볶이를 먹고 온 터라 배가 불러 뭘 사진 않았지만 오래된 빵집의 빵 굽는냄새는 늘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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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정보센터와 랜떡볶이


첫 여행지는 무섬마을이다. 관광홍보센터에서 지도를 보자하니 무섬마을 가는 길에 제민루와 삼판서 고택이 있다길래 한 번 들러보기로 한다. 제민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층짜리 누각이다. 활짝 핀 팔작지붕은 화창한 하늘과 조합이 좋다. 제민루는 1433년(세종 15년) 영주군수가 설치한 공립의료기관이다. 현재는 누각만 남아있지만 이후로도 계속 영주 사람들이 의료기관으로 운영해왔다고 한다. 살짝 높은 둔덕 위에 위치한 제민루 앞으로는 서천이 흐르고 그 너머 도로와 마을들이 보이는데 제법 경치가 괜찮다. 제민루 바로 앞에는 삼판서 고택이 있다. 삼판서 고택은 3개의 가문에서 판서를 배출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복원된 전통가옥 삼판서 고택은 그리 크진 않지만 돌계단하며, 큰 기와지붕하며, 우람한 나무기둥하며 그 겉모습만 봐도 고급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판서를 배출해내봤자 그저 그런 평범한 판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중 하나가 정운경이다. 정운경은 본인의 이름으로는 유명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아버지로는 유명하다. 바로 조선의 개국자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다. 이 집은 정도전의 고향이며 어릴 적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정도전의 봉화 정씨는 경북 봉화군을 말하지만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주시 소속이다. 원래 정도전의 집안은 지방 향리 출신들이었지만 정도전의 할아버지가 군기감에서 일했고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이 과거에 급제하고 중앙관직을 제수받으면서부터 집안이 크기 시작했다. 한 집안을 세우고 그 아들은 한 국가를 세운 이 집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아가보기 위해 주변을 계속 어슬렁거리고 예쁜 사진을 찍어놓고도 연신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본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선 안 된다. 영주에서는 좋은 기운을 받아갈 수 있는 곳들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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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루와 삼판서고택


물 위의 섬, 무섬마을

차를 타고 영주 남쪽까지 쭉 내려간다. 목적지는 영주의 대표관광지로 SNS에서 부상하고 있는 무섬마을이다. 무섬마을은 본디 '물섬마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무섬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SNS에서 인기몰이를 한 건 비교적 최근이지만 무섬마을은 17세기 조선 후기에 조성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내력이 깊은 전통마을이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됐음에도 그 브랜드 명성도가 일찍이 알려지지 않은 건 마을을 휘감고 있는 낙동강의 지류 내성천이 마을과 외부를 단절시켜 교류가 왕성하지 않아서인 듯하다. 그 덕분에 무섬마을은 전통을 원래의 모습대로 지켜가며 이어가고도 있다. 그리고 햇빛조각이 내려앉은 내성천의 물빛에 반짝이는 마을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다. 마을이 너무 커서 위압감이 들거나 요란하지 않고 천을 따라 마을을 돌아보면 마을이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갈하고 서정적이다. 시적인 형용사는 무엇이든 갖다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고려시대 말부터 명문가 집안은 동성촌을 이루어 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쭉 내려오다 신분제가 동요하던 조선 후기에 이르면 기존의 양반 명문가 집안들은 벼락양반이 된 이들과 근본이 다르다는 걸 내세우기 위해 더더욱 동성촌을 만들어 그들만의 세상을 고착화하려 했고, 혈연 내지 지연에 기반을 둔 2~3개의 명문가 집안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무섬마을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동성촌 마을들은 대부분 반촌(班村)이다. 반촌은 주로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일컫는 말로 소작을 하는 평민들과 노비들도 소수 같이 모여 산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주의 교동마을 역시 반촌이다. 대표적인 예시를 든 무섬마을, 하회마을, 교동마을이 전부 영남 내륙지방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을 보면 양반의 반촌들이 유림의 성지인 영남내륙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듯하다. <택리지>에는 "나라 안 장원 중에 아름답기로는 영남이 제일이다. 그래서 사대부로서 수백년 동안 때를 만나지 못했어도 그 존귀함과 부유함이 줄지 않았다. 그 집들이 각자 한 분, 훌륭한 조상을 모시고 한 장원을 점유하여 일가끼리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집을 공고하게 유지하여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반남 박씨는 교과서에서도 거론될 정도의 명문가 집안으로 고려 말 친원파 권문세족과 싸우다 처형됐던 신진사대부 박상충이 있고, 태종 이방원의 2세대 오른팔이었던 박상충의 아들 박은, 조선 후기 <연암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 구한말 개화파 젊은세력들을 육성한 박규수 등이 있다. 더불어 조선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를 배출해내기도 했다. 예안 김씨로도 불리는 선성 김씨 집안에서는 세종 재위 집현전에서 활약했던 김증, 임진왜란 때 선조를 보필했던 김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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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은 대규모 반촌마을과 달리 기와집만 있지 않고 초가집도 꽤 있는 걸로 봐선 마을에 살던 평민들의 수도 나름 많았나 보다. 한옥은 지역별로 남부지방은 넓직한 마루를 지닌 'ㅡ자형' 이, 중부지방은 'ㄱ자형' 내지 'ㄴ자형' 구조를 지니는데 영주는 위치상 두 지역 한옥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마치 한옥 박물관 같다. 더불어 지역과 무관하게 부가 많은 고급한옥집의 경우 '튼 ㅁ자형'을 취하고 있는데 심심치 않게 볼 수도 있다. 무섬마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백사장이다. 물빛이 반짝이는 내성천 위로 외나무다리가 길게 놓여 있고 이곳이 무섬마을을 인증하는 포토존이다. 무섬마을의 원래 이름이었던 '물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 이라는 뜻이다. 한자식 명칭은 '물 수'에, '섬 도'를 써서 '수도리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에 이 내성천은 제일 중요한 마을의 은하수다. 좁은 외나무다리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며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물이 워낙 맑고 단아해 빠져도 상관없어 보이긴 한다. 아니 나도 모르게 매료되어 손을 내밀곤 물을 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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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다음은 영주의 대표관광지 중 하나인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무섬마을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어서 차로 다소 시간은 걸리지만 소수서원은 비단 영주의 대표관광지일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곳들 중 하나다. 한국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나열할 때 꼭 들어가야 하는 우리나라 또 하나의 얼굴인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지만 가본 사람들 중에도 소수서원이 영주에 있다는 것을 까먹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 서원이라 함은 성리학의 사학을 담당했던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으로 특정 향촌사회의 사대부들 내지 선비들이 관리하며 성리학을 풍성하게 발전시키고, 유능한 학자들과 정치인들을 배출해내며, 성현에 대한 제사도 지내며 전통문화를 계승해가는 등 해당 지역의 여론을 모아 공론화도 시키며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나갔던 다기능의 공공시설이었다. 그 시작을 알린 장본이 영주의 소수서원이니, 영주야말로 한국성리학과 조선사회 질서의 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토록 중요한 곳이었기에 비록 사립운영이여도 국가에선 그 혜택을 많이 봐주었고 시간이 흘러 정치권이 부패해지면서 서원의 본질이 퇴색되어버리긴 했다. 하여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조리 철폐해버리니, 이때 문을 닫은 서원의 수가 1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상을 본질로 착각해선 안 된다고, 서원의 변질은 어디까지나 부패한 사회상으로 인해 훼손되었을 뿐 서원 그 자체의 원목적과 원취지까지 부정해버리기엔 서원의 가치는 대단히 소중한 자산이다.


소수서원은 중종 재위기였던 1542~43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의 사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을 처음 만들었다. 안향은 고려 말 중국의 성리학을 이 땅에 '처음' 도입한 성리학자였다. 주세붕이 첫 건립했을 당시 이름은 '백운동 서원'으로 최초의 서원을 한국에 최초로 성리학을 가져온 학자의 고향에 설립했으니 이 자체로 얼마나 역사적인가. '백운동'은 주세붕이 중국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백록동 서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던 시절 흉년이 들어 지역사회의 안정이 불안할 때 질서 유지를 위해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도덕이 곧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국가에서 유교정치의 활성화가 곧 교민의 한 방법이었다. 주세붕이 국립학교인 향교가 아니라 사립으로 학교를 세운 이유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를 거치며 많은 사림들이 정치판에서 희생되는 것을 보고 현실정치와는 무관한 오로지 학문을 닦고 선현에 대한 존경을 내비칠 수 있는 순수한 학술기관을 만들려던 의도였다. 물론 그 내부엔 사림들이 지방에서 지배층으로의 위치를 유지하고 최소한의 영향력을 확보해 향촌을 그들의 근거지로 구축하려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서원은 해당지역 향촌의 교화를 주도하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인지 서원의 개념이 생소했기 때문에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은 초창기 큰 지지를 받진 못했고 운영비 부족으로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 주세붕의 임기가 끝이 나고 백운동서원은 철폐의 위기였으나 1545년 오늘날의 경상도 도지사라 할 수 있는 신임 경상도 관찰사 안현이 재정모금을 위해 나섰다. 안현은 백운동서원에 모셔진 안향의 후손으로 조상을 위한 이 공간을 살리고 싶어 경상도 각 지역에서 소위 펀딩을 받아 서원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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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jpg 안향 영정


그리고 마침내 백운동서원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에 의해 번성하게 된다. 이황은 을사사화를 목격한 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곤 속세로 나오기를 꺼려했으나 왕의 여러 차례 부름에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받지만 외관직을 지원한다. 1548년 그렇게 퇴계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했으나 친형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자 가족 구성원이 같은 부임지를 맡으면 나쁜 선례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기생 두향과의 절절한 연을 뒤로 하고 근무지 변경을 요청,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1550년 이황은 앞서 선임자인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의 취지를 높이 사 이곳을 계속 운영해갈 수 있도록 왕에게 물질적 도움을 요청한다. 이황 역시 사화를 겪었던 사람으로 주세붕의 의도대로 정치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계와 상관없는 순수한 학문기관으로서 서원의 기능을 강조하려고 했던 듯하다. 이황은 경상도관찰사 심통원에게 편지를 보내 "살피건대 오늘의 국학은 어진 선비들의 소관이지만 대체로 군현의 향교는 한갓 글을 가르치는 도구로만 남고 교육은 크게 무너져, 선비들은 향교에서 지내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이 여깁니다. 서원 교육이 이제 흥성한다면 교육의 퇴폐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배우는 사람이 의지할 바가 있고, 사림들의 기풍이 따라서 크게 변하여 습속이 날로 아름다워질 것이며 임금의 교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13대왕 명종은 이황의 요청을 받아드려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 다량의 서적들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했다. 무엇보다 명종은 서원의 이름을 개칭할 것을 제안했고 '무너진 학문을 다시 잇다'는 뜻의 문구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따온 '소수'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 이름의 편액을 하사해주었고 이로써 소수서원이 탄생했다. 국왕이 직접 편액을 내려주는 행위를 '사액'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의 사액 사건은 당대 큰 화제거리가 되어 이후로 지방 곳곳에 유력사족들이 서원 건설에 나섰다. 물론 결과적으로 서원은 정치화되었지만 적어도 소수서원만큼은 그 취지에 맞게 정치폭풍에 크게 휘말리지는 않았으며 이황의 학맥을 이으려는 제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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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의 서원과 혹은 향교를 많이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소수서원에 갔을 때 살짝 당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서원과 향교는 일직선 구도로 앞에는 공부방이, 뒤에는 사당이 놓여있는 전학후묘의 위치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소수서원은 첫 서원이라 그런지 방형 구조로 왼쪽에 안향의 사당이 있고, 오른쪽에 공부방과 기숙사들이 있는 동학서묘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에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전통이 있는데 주세붕은 이 전통에 의거해 더 중요한 서쪽에 안향의 사당을 위치시킨 듯하다. 소수서원은 언제 가든 그 사상적, 학술적, 전통적 가치를 사색할 수 있지만 미학적 가치를 십분 느끼기 위해선 봄이나 여름을 추천한다. 애당초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세울 때 그 목적이 현실정치에서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었기에 의도적으로 서원의 위치를 깊은 산중으로 몰아넣었다. 소백산맥의 한자락에 소조히 앉아 푸르른 신록이 품고 있는 모습은 기타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청쾌한 생명력과 청명한 자연의 아늑함을 만들어준다. 시원시원한 소나무들과 소수서원이 들어서기 전 있었다는 숙수사의 전아한 당간지주는 수직적 고상함을, 서원의 배치와 작은 개울은 수평적 우아함을 직조해주니 소수서원의 아름다움은 편안하다. 많은 방문객이 찾아도 자연과 선비의 기운 탓인지 엄숙해지고 한적해지는 공간이다. 이런 게 한국의 미학이고 한국 민족사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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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여러 학술기관 내지 연구기관들이 다양한 분야에 존재한다. 기관특성상 수익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난에 시달리는 기관들도 많을 것이다. 취지가 나쁘지 않고, 정치성이 배제되어 있고, 미래지향적 목표가 뚜렷하다면 여러 행정부처에서 기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미국의 스탠퍼드 연구소와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우리가 얼핏 듣기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정부의 도움 덕에 기관소들이 크게 융성했으며 각각 실리콘밸리의 전설을 만들어냈고 노벨상 수상자를 최다로 배출해내기도 했다. 소수서원의 탄생일화는 오늘날 학술 및 연구 그리고 창작기관들이 정부의 도움으로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 그 필요성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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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과 더불어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대구의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개의 서원은 교육을 통해 이상적 인간상을 만드려는 인류사적 보편성과 그 역사적 완전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풍기인삼을 먹고 선비촌에서 하룻밤을

저녁으로는 '삼뜨락'이라는 식당에서 인삼한정식을 먹는다. 풍기에 왔는데 인삼을 안 먹을 수가 없다. 풍기는 개성, 금산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인삼이 유명했다. 고려시대 때부터 '고려인삼'은 하나의 브랜드로 외국에서 대단히 큰 사랑을 받았다. 이중에서 영주의 풍기인삼은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을 재배한 지역이라고 하니 그 의의가 남다르다. 하기사 소수서원을 품고 있는 것은 물론 내일 실컷 구경하게 될 그 휘황찬 소백산맥의 땅에서 나오는 인삼이니 그 품질을 의심할 수가 없다. 네이버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4개의 업체에서 약 20여 종의 풍기인삼을 전국에 유통하고 있다고 한다. 식당 '삼뜨락'은 풍기인삼으로 갖가지 요리를 내는 식당으로 정식을 먹으면 인삼을 정말 다양한 형태로 먹을 수 있다. 마지막 인삼차까지 먹으면 여독이 풀어지고 세상 건강한 몸으로 에너지 충전되는 기분이다. 물론 기분이지만 플라시보라는 게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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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소수서원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곳에서 숙박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취침을? 소수서원 근처에 영주시에서 선비촌마을을 조성해주었다. 물론 인위적으로 만든 마을이기에 심오한 역사적 의의를 찾기 민망하지만 초가집에서 옛 우리의 조상들처럼 자는 체험은 그 자체로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나도 전혀 몰랐는데 친형이 알아왔다고 한다. 그냥 분위기만 내겠거니 싶었는데 우리 형제는 그 고증에 연신 여러 가지 의미를 품은 감탄을 자아낸다. 외부는 고증 그대로지만 내부는 그래도 냉난방도 되고 화장실도 깔끔하고 TV도 있어서 있을 건 다 있지만 멀끔한 호텔을 기대하진 말자. 우리 조상님들 그중에서도 상민들의 집이다. 다음날 아침 옛 조상들의 평균키에 맞는 낮은 문을 눈이 바닥을 향할 정도로 허리를 굽힌 채 나가면 대문으로 보이는 광경이 기가 찬다. 키 큰 소나무들로 외부 시야를 전부 차단시킨 채 오로지 보이는 거라곤 낮은 담벼락의 여러 초가집들뿐이다. 과장을 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여행하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선비'는 틀에 박힌 생각에 갇혀 보수적인 질서에 연연해하는 안 좋은 은어로 쓰이고 있다. 새로움과 파격에 늘 목말라있는 나로서도 개인적으로 이런 의미의 선비들을 싫어한다. 실제로 조선의 말년은 부정적인 의미의 선비정신에 탐닉되어 무너진 이유도 있다. 과거의 질서에 집착해 변화를 거부했고 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기득권을 놓치 못하는 정치에 의해 특정 사상이 퇴락한 현상일 뿐이다. 더불어 무슨 사상이든 그 사상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폐쇄적인 원리원칙의 함정에 걸려들면 변질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선비사상 고유의 본질 자체가 훼손되고 부정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선비사상의 옷이 맞지 않을 개인이 있을 순 있으나 자기수양의 가치, 도덕적 생활을 추구하는 정향점, 학문의 즐거움, 청렴에 대한 이상 등은 존중되어야 하며 박수받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부석사

둘째날 드디어 가장 기다리던 곳으로 떠난다. 20살 새내기 때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충격. 전혀 기대를 하지 못했다가 갑자기 내가 마주한 웅혼한 아름다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건축하자, 미술사학자들이 뽑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부석사다. 부석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두 명의 승려 중 의상대사가 문무왕 16년이었던 676년 세운 화엄10찰 중 한 곳으로, 이 절 한 곳에만 국보가 5가지나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의 통일 즈음 활동했던 승려이다. 신라는 한국사상 최초로 두 거대한 국가를 통일시킨 뒤 한 번도 통치해본 적 없던 지역의 백성들까지 아울러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통일 직후 큰 저항 없이 효과적으로 민족 통합을 도모해갔다. 그 방편으론 역시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는 행정과 정치시스템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 시대엔 정치행정 외에도 민심 통합에 중요한 수단이 있었으니 종교, 그중에서도 불교였다. 통일 직후 신라의 민심수습엔 불교가 혁혁한 기능을 했고, 특히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바지한 공이 컸다. 두 사람은 동시기 승려로 둘이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던 찰나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는 신라에 남기로 했고, 의상대사는 예정대로 당나라로 넘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뒤 귀국했다. 이후 원효대사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의상대사는 신라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국내 불교 교리의 체계와 질서를 닦았다. 원효와 의상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불교 종파를 각각 정토종, 화엄종이라고 하는데 언뜻 두 종파의 지향점이 달라 보이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했기에 민생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불교가 완성될 수 있었다.의상은 신라 내 불교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화엄종을 내세워 사회질서와 치안유지에 기여하며 이를 위해 각 지역별로 총 10개의 사찰을 만드는데 이를 화엄10찰이라고 한다. 당시 불교나 모든 행정의 중심이 수도에 쏠려 있었는데 정부 지원을 받는 사찰을 지방 곳곳에 창건해준 덕에 지방민들을 교화하고 그들의 사회통합을 꾀할 수 있었다. 현재도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사찰이 영주의 부석사다.


부석사의 창건신화는 이렇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을 하려던 중 과거 의상이 잠시 몸을 의탁했던 집주인의 딸 선묘 아씨가 의상을 사모하였는데, 승려의 신분으로 선묘 아씨는 의상과의 사랑을 꿈꿀 수가 없어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 후 의상의 귀국길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귀국 후 소백산맥을 유랑하던 의상은 그곳에 사찰을 건립하려고 했는데 도적떼들(혹은 사이비 종파)의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번에는 큰 돌로 변한 선묘 아씨가 도적의 무리들을 퇴치해주어 마침내 의상은 절을 창건할 수가 있었고 이 영험한 돌을 의상은 절에 두고 직접 모시기로 한다. 돌이 공중에 떠 있다고 해서 의상은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은 것이다. 이런 신화가 전해지면 꼭 실험해서 증명해보이고야마는 호기심 덩어리들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이중환이 부석사의 돌이 실제로 떠있는지 여부를 실험하기 위해 돌과 지표면 사이로 노끈을 땡겨보았는데 진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재미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에 여러 방송국에서 실험을 해보면 통과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공간을 인식할 때 평면적으로 받아드리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다. 평범한 미술작품들을 보면 입체적이지 못하다. 공간을 장식하는 예술에서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는 일은 그 예술의 수준을 훨씬 높여준다. 감상자로 하여금 그것이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든, 재창조된 작품이든, 온라인의 가상공간이든 그곳을 입체적으로 느껴지게끔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소실점과 원근법은 미술사의 획기적인 기술이었으며, 영화의 장면을 장식하는 미장센에서 z축의 활용도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특정 건축의 x축과 y축은 쉽게 인식되지만 z축을 연출하는 순간 그 건축의 공간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부석사가 그렇다. 천왕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석사의 하이라이트인 무량수전까지 자리잡고 있는 요사채들이 공간의 폭도, 높이도 아닌 깊이에 따라 줄지어있다. 이때 무량수전은 안양루에 가려져 있다. 가운데를 종짓는 길과 안양루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감상자 시선의 z축을 통해 공간의 심도를 살리는 수준높은 배치방식이다. 안양루까지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공간의 깊이 연출 덕에 무량수전에 가까워졌음에도 바로 앞에 서기 직전까지는 무량수전을 온전하게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올라섰을 때 '부석사 무량수전'이라는 위대한 건축을 영접하는 극적인 효과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무량수전에 앞서 안양루 계단을 올라서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해주는 부석사의 첫 번째 국보가 있으니, 바로 국보 17호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사찰의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가볍게 만들 수가 없다. 당대의 석공기술을 최대한 녹여내어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 균형미의 탁월함으로 평가받는 무량수전 석등은 그 맵시가 상당히 우아하고 고매하다. 새침한 기둥 위에 툭하니 얹어 있는 화사석은 정갈하고 정연한 고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석등 4면에는 보살상들이 조각되어 있어 '석등은 부처의 진리'라는 종교예술학적 의미를 현숙하게 표상하고 있다. 무량수전 하나만 봐도 숱한 감동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하니 말 그대로 용 그림의 눈동자이다.


그리고 석등 뒤로 마침내 마주하는 국보 18호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주 독특한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목조건축에서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은 건축의 단순하고 단아하고 정갈한 멋을 내기 위해 하나의 세트처럼 엮인다. 건물 자체의 맵시를 단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팔작지붕은 건축의 웅장함을 빚어낼 때 쓰이는 지붕 양식이다. 팔작지붕을 통해 건물을 의젓하고 늠름하게 보이게 하면서 주심포 양식과 목재 특유의 색상을 통해 정감 가는 맛을 결코 잃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것이다. 무량수전의 기둥들은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 양식으로 기둥의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 멀리서 볼 경우 듬직하게 지붕을 지탱해주는 안정감을 준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으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많은 관광객들이 무량수전을 찾아서 그냥 지나쳐버리는 뷰가 있다.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다가 우연찮게 우연찮게 얻어걸리는 경우는 있지만. 최근에는 이 뷰가 인지도를 많이 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바로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무량수전을 등지고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시선에서 본 소백산맥의 기슭이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서양의 건축은 밖에서 안을 보는 시선이, 동양의 건축은 안에서 밖을 보는 시선이 발달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동양건축의 매력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건축물도 좋지만 건축물을 등지고 그 외부 경치를 바라봐야 한다. 최순우 선생님의 글 제목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아니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가 아닌가. 동양 내에서도 건축의 안에서 밖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한국의 강점은 전국토의 자연을 대상으로 건축물을 가장 좋은 위치에 점지하는 능력이다. 하물며 부석사를 창건한 통일 신라의 의상 대사는 왕실의 비호와 지원까지 받고 있던 터라 길지 중에서도 길지를 택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이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라 함은 풍수지리에 대해 모르는 일반인조차 그 자리에서 보이는 자연경관의 뷰가 탁월해야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가졌는지는 무량수전의 시선으로 그 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마치 파도가 치는 듯한 한국 산맥의 마스터피스를 관람해야 한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중략)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의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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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의 배치와, 무량수전의 건축, 그리고 안양루에 올라 펼쳐진 경치에 취해있다가 빠뜨려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가 있다. 무량수전 내부로 들어가면 세 번째 국보, 국보 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 있다. 내부에는 사진촬영이 안 되기에 온전하게 작품만을 감상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위해 한국사 공부를 기계적으로 꾸역꾸역 머리 속에 넣고 있을 때, 하나의 사진을 보고 내가 암기가 아니라 감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대학교 입학 후 운이 좋게도 1학년 학과 답사 때 그 한 장의 사진을 실물로 보게 되었는데 그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웅장했다. 무교일지언정 불교의 절대자 앞에 몸이 굳는 기분. 이 준엄한 느낌은 종교적인 힘이라기보단 미학적인 힘이었다. '소조'라는 뜻은 흙으로 만든 불상이란 뜻이다. 단지 금으로 도색되어 있을 뿐 불상은 나무를 골격으로 흙을 덧붙인 형태다. 불상의 정체는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인지,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대개 아미타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수인은 석가불의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다운로드 (1).jfif 사진출처: 문화유산채널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표정은 인자한 웃음기가 부재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종교적 규율과 교리를 수호하는 엄격한 부처님인 듯하다. 가는 눈은 반쯤 뜨고 있어 중생을 내리보고 있으며 입술은 유독 두툼하게 모여있다. 눈썹과 이어져 있는 콧대도 꼿꼿하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결코 쉽게 범접할 수 있는 불상은 아니다. 머리에는 육계(부처의 정수리뼈가 솟아 생긴 상투 모양의 장식)가 시선을 끈다. 크기부터 2.78m로 대한민국 불상 중 가장 큰 불상이다. 옷의 주름도 많이 접혀 있지만 한 겹 한 겹 입체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다. 몸매도 안정적이고 묵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광배다. 이토록 화려한 광배는 쉽게 볼 수가 없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생 때였던 나는 차라리 화염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 광배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당시 나는 광배의 개념도 알지 못 했기 때문에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광배를 화염으로 착각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광배는 위의 작은 원과 아래의 큰 원, 두 개가 살짝 겹쳐 있다. 각각 머리와 몸을 비춰준다고 해서 두광과 신광이라고 한다. 두광과 신광 안쪽으로는 보상화무늬, 즉 아주 화려한 식물 모양의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소조여래좌상뿐 아니라 그 무량수전 내부 벽에는 탱화들이 그려져 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작품들로 무량수전 내부는 종교적으로 거룩한 곳인 동시에 여러 예술품들이 모여 있는 고급 갤러리라 할 수 있다.


부석사의 명성이 워낙 자자하니 무량수전에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무량수전 뒷편으로까지 가면 그 인적이 확 줄어든다. 좁지만 포근한 산길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부석사의 네 번째 국보가 있다. 국보 19호 부석사 조사당이다. 조사당이란 사찰을 만든 창건주나 사찰과 관련된 인물을 모시는 사당이다. 부석사 조사당은 창건자 의상대사를 위한 공간이다. 부석사 조사당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는 전형적인 고려 초기 목조건축물이다. 어떤 부분도 드러내놓는 곳이 없고 전체적인 조화로운 비례에 따라 모든 요소들이 균형을 맞추어 건축이란 최종적으로는 종합미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흰색이 지배적인 가운데 황색을 곁드는 색채배합도 건물을 한층 호젓하게 해준다. 그런데 감상자의 시선을 거슬리게 하는 어색한 옥에 티가 하 있으니 바로 철창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조사당 앞에 꽂자 그 자리에서 나무가 났다는데 소문에 의하면 이 나무의 나뭇잎을 따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자 하도 많은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갔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관리 차원에서 나무를 철창으로 가두어버렸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취지는 좋으나 미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철창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100%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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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까지 보고 내려가는 길에 부석사 삼층석탑이 있다. 본디 석탑은 금당(부석사의 경우 무량수전)과 석등 사이에 놓이는데 부석사는 석탑이 옆에 한 켠으로 밀려나 있다. 위치선정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석탑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조사당에서 무량수전으로 다시 내려오는 길에 이 석탑에 서면 부석사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석탑 앞이야말로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부석사에서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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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부석사의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보고 부석사 투어를 끝마칠 수도 있지만 아직 한 군데가 남았다. 마지막 국보를 보러 가야 한다. 표지판을 잘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르고 바로 내려갈 수 있지만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 중 하나. 바로 부석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다. 큰 내력의 사찰들은 저마다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고 사찰의 오래된 유물들을 보존 및 전시를 하고 있다. 부석사의 성보박물관에는 다섯 번째 국보인 국보 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가 있다. 부석사의 조사당은 국보 19호에 등록되어 있는데 조사당 내부의 벽화는 국보 46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역사적, 미술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다만 손상이 심하여 그림의 정밀한 표현기법까지 감상하긴 다소 힘들다. 조사당 벽화는 전통적인 불화 방식대로 녹색 바탕 위에 적색, 백색, 금색 등을 활용해 채색하였다. 조사당 벽화는 길이 2.05m, 폭 0.75m로 1377년 고려 우왕 재위 3년 차에 제작되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벽화는 국보 46호의 조사당 벽화가 아니라 스님들의 영정사진이고 문화재 보존을 위해 조사당 벽화는 성보박물관에서 따로 관리 중이다. 조사당 벽화는 총 6개의 그림이 이어져 구성되어 있다. 여섯 그림의 주인공은 불법 혹은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들이다. 구성원으로는 범천,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 4명이다. 범천은 원래 인도 최고 신이었으나 불교 탄생 후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이직(?)한 호법신들 중 최상위 신이다. 말하자면 경호실장 같은 존재다. 제석천은 사천왕 4인을 거느리는 불법 수호신이며, 사천왕은 불국토의 4방(동서남북)을 관할하는 수호신들이다. 원래 이 호법신들은 부처를 지키기 위한 존재들인데 조사당에서는 의상대사를 지키고 있으니 우리 선조들이 의상대사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영주 여행의 디저트, 영주 사과

영주 곳곳을 차로 여행하다보면 계속 눈에 띄는 것이 사과나무 밭이다. 부석사 가는 길에도 넓은 사과나무 밭이 길섶에 있고 곳곳에 사과주스와 사과원액을 파는 분들이 영주사과를 내다 팔고 있다. 영주를 빛내는 또 하나의 명물이 사과다. 영남내륙지방은 연교차가 크고 여름철 기온이 높기 때문에 당도높은 과일들이 많다. 영주뿐 아니라 인근 경북 지방에선 사과를 비롯해 다양한 과일들이 명절마다 전국을 유통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니 영주여행을 오면 사고갈 기념품으로는 사과만한 게 없다. 부석사를 내려와서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길에 영주사과만을 다루는 사과디저트 카페를 형이 찾아왔다. '애플빈커피'라고 이곳에서 사과주스, 사과에이드, 애플파이, 사과칩과자까지 영주여행의 훌륭한 후식이었다. 아! 조금 더 일찍 나와 아침에 먹을 걸.. 그래도 밤에 안 먹었으니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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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는 기운이 참 좋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미래형 산업화 도시는 아니지만 그 유서 깊은 내력들을 보면 소박하고 정겹고 위안을 주는 곳이다. 기운이 좋으니 좋은 사람들을 배출하고,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좋은 것들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소백산맥의 어느 아늑한 곳에 자리잡아 그 존재를 말없이 사뿐히 드러내는 무섬마을, 소수서원, 부석사 모두 그 기운이 분명 소백산맥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모두 울우람한 태백산맥의 위용과 정기를 우러러 보지만 소백산맥의 훈훈함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소백산맥의 은은한 낭만을 느끼려면 영주를 와야 한다.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과 같은 집안 사람인 안축이 고려 말 충숙왕 때영주를 여행하고 지었다는 <죽계별곡>을 소개하며 끝맺을까 한다. 비록 소수서원이 생기기 전 시점이지만 영주의 선선하고 고매한 분위기를 아주 잘 묘사해주는 경기체가다.


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높고 물맑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3장

산새는 채봉이 날아 오르련듯·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으로.
아! 큰소리치며 신임자를 맞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4장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꼴새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이 구름처럼 흘러내려 끓임없는데,
타고나 천하절색인 봉선화(小桃紅)맘 때 쯤이면
아! 천리 먼 곳에 두고 서로 그리워함을, 또 어찌 하겠습니까?


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하루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김봉규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한국고유의 사상을 통해 인문학을 공부하시는 김봉규 작가가 조선시대 51명의 선비들을 뽑아 선비사상과 정신을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이황, 류성룡, 이언적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선비들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선비들까지 학문, 정의, 백성, 나라, 마음이란 5가지 테마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선비정신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어떤 의미로 현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준답니다. 물론 읽다 보면 선비들의 성리학 특유의 답답함과 도덕적 교훈 등이 살짝 거슬릴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했던 선비들의 진심어린 태도는 경의를 보내게 되죠. 모범을 세운다는 것, 본을 받는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51명의 사상과 일생을 통해 자기절제와 자기수양을 배워보심이 어떨까요.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

전설의 반열에 오른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고전영화입니다. "Seize the Day", "카르페디엠" 등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명대사들을 배출한 불후의 명작으로 '좋은 선생님이란 무엇인가',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교육이 그저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잘못된 시대에 '공부도 즐거움'을 알려주죠. 공부란 지식을 꾸역꾸역 넣거나 누군가보다 더 잘해야하는 경쟁의 개념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행위인 겁니다. 공부는 성취해야하는 목표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죠. 소수서원이 처음 건립됐을 당시 교육이념과 맞닿지 않나 싶네요. 영화에 비해서, 과거에 비해서 현재의 교육에 반성하게 하죠. 제목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극중 동아리 이름으로 나오지만 잘못된 이 세태를 풍자하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죽은 시인의 사회에 살고 있는 거 같고요. 이런 떨떠름한 현실자각에 한숨쉬게 되지만 영화 만큼은 매순간 매장면 묵직한 감동을 준답니다. 영원한 대배우 로빈 윌리암스의 명연기와 더불어 현재 할리우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의 젊은 청년시절까지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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