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차가움을 여행하다
겨울이란 계절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보자면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하얀 눈들이 소복히 쌓여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순백의 이미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며 웬만한 생명체가 살아남기에는 힘든 푸석한 파멸의 이미지다. 보통 겨울여행은 전자의 이미지를 찾으러 떠난다. 그러나 때로는 비장미를 찾아 떠나는 겨울여행도 남다른 정념을 가슴에 각인시킨다. 그래서 춥디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철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철원의 과거 순우리말 지명은 '쇠둘레' 혹은 '쇠벌'이었다고 한다. 지명의 어감에서 '쇠' 특유의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이 난다. 어감 하나로 철원의 이미지를 규정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감을 잡았겠지만 철원은 한반도의 베인 허리에 속한 곳 중 하나로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장면들을 몸소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다. 겨울 특유의 파멸의 정서를 느끼기에 역사적으로, 기후적으로, 지형적으로 철원만한 곳이 없다. 그러나 철원을 이런 정감가지 않은 무생명의 척박한 곳으로만 묘사하려는 건 아니다. 철원을 여행하다보며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철원만의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신철원의 시내를 시작점으로 했을 때 차로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승일교이다. 승일교 자체가 철원의 독특한 역사를 방증해준다. 철원의 위도는 북위 38도로 한반도가 공식적으로 분단되기 전 정확하게 38선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철원은 북한의 영토였고 6.25전쟁 막바지 휴전선이 새롭게 그어지면서 일부 북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철원 땅은 대한민국의 공식 영토로 편입되었다. 승일교는 아직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인민들이 공사를 시작했으나 공사가 절반 정도만 진행되던 중 하필 6.25전쟁이 터져버려 미완공된 채로 남아 있었다. 이후 전쟁이 휴전되자 나머지 절반은 한국정부가 공사를 이어받아 완성한 다리가 승일교다. 이 때문에 다리의 정가운데를 기준으로 양 옆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부른단다. 50년대에 만들어졌던 다리 중 아직까지 남아있는 보기 드문 다리로 그때 당시 공법으로 만들어진 다리 특유의 낡은 감성이 돋보인다. 남북한의 손길이 모두 담긴 국내 유일의 건축물이며 이런 탄생배경을 담아내는 듯 다리의 이름을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 자를 각각 합쳐 '승일교'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설일 뿐이다. 최근에는 육군사관학교 1기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제7사단 8연대와 5연대를 이끌다 실종되었던 박승일 대령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다리의 이름을 '승일교'로 지었다는 설이 더 부각되고 있다. 명칭의 유래야 어찌됐든 북한이 짓기 시작하고 남한이 완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철원 여행의 첫 목적지부터 이렇게 북한과 분단의 흔적을 물씬 느끼게 된다.
승일교를 걷다보면 승일교도 승일교지만 승일교에서 보이는 한탄강과 그 주변의 주상절리들이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철원의 자연지형 또한 한국의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현무암지대로 얼마 전 철원군에서는 한탄강을 따라 주상절리 트래킹 코스를 따로 조성해두었다. 철원은 신싱대에 화산활동을 겪었다. 용암이 지표면의 갈라진 틈들 사이사이로 분출되어 흘렀기 때문에 지표면을 평평하게 녹여버렸다. 이러한 형태의 용암분출 형태를 '열하분출'이라고 하며, 열하분출로 용암이 녹여 만든 평탄한 지대를 '용암지대'라고 한다. 지표면 밖으로 나와 식어버린 용암은 현무암으로 굳어버렸기에 철원은 현무암질의 평탄한 평지를 가지고 있다. 단 철원의 평지는 용암이 녹여 평평하게 만든 지대이기에 자연스레 주변의 산들로 에워쌓이게 되어 철원분지가 되어버렸다. 분지 특성으로 인해 철원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날씨로도 유명하다. 분지로는 대구도 유명한데 상대적으로 위도가 낮은 대구에서는 더운 날씨가 부각되어 '대프리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고, 위도가 높은 철원에서는 간혹 러시아보다도 낮은 기온으로 떨어져 많은 군필자들이 극한의 추위를 회고하기도 한다.
현무암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하얀 화강암은 침식과 풍화의 작용을 가로로 받는 반면 현무암은 수직으로 받기 때문에 철원의 현무암지대는 한탄강에 의해 수직성이 강조되는 현무암 특유의 절벽을 만들어낸다. 이런 수직 절벽을 '주상절리' 라고 하는데 한국의 지형은 대부분이 화강암 지대인지라 제주도, 울릉도 등 도서지역을 제외한 내륙지방에서 현무암 주상절리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때문에 많은 지리학도들이 철원을 찾는다. 지리학도가 아니더라도 꺼무끄름한 암석과 절벽들을 철원 곳곳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한탄강과 현무암 주상절리가 빚어내는 가장 준걸한 경관은 고석정에서 만끽할 수 있다. 고석정은 한탄강의 꽃망울 같은 존재다.
이미 여러 차례 사극의 단골 촬영지로 소개된 고석정은 한탄강과 주상절리 트래킹 코스에서 가장 멋진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스팟에 점지되어 있다. 하늘을 향해 당당히 모습을 뽐내는 고석정은 물론이거니와 고석정 양옆으로 한탄강이 흐르는 협곡은 세속과 분리된 성스러운 멋을 시원시원하게 보여준다. 겨울에 부는 찬바람은 고석정과 한탄강, 그리고 현무암 주상절리의 매정하고 무뚝뚝한 매력의 분위기와 교묘하게 어울린다. 큼직한 검은 현무암의 돌덩이들이 매표소에서부터 한탄강변까지, 그리고 고석정까지 이어져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도 있고, 매끈한 검은 피부의 현무암 등 고석정 일대에 현무암이 비주얼라이징해주는 씬들은 어디서 어떻게 보든 하나 같이 명장면들이다. 신라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이곳 고석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단다.
고석정과 얽힌 가장 유명한 사연은 이곳이 임꺽정의 은둔지였다는 전설이다. 임꺽정의 네임드에 비해서 임꺽정과 관련한 장소나 유적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고석정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 고석정 중간에 작은 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임꺽정은 관군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의적으로서 세상을 바꿀 야망을 꿈꾸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임꺽정이 이곳 고석정에 왔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그 흔적을 추적해볼만한 껀덕지조차 없다. 임꺽정은 황해도와 경기도 인근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애당초 임꺽정은 흉포한 도적이었을 뿐 의적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고석정과 임꺽정이 인연을 맺었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저 도적에 불과했던 임꺽정을 의적으로 둔갑시켜 그를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임꺽정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조선 중기 부정부패와 가렴주구가 판을 치던 시대에는 그런 아이콘 같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민중들은 세대에 세대를 거치며 고석정에 임꺽정의 대중적 이미지와 기대를 투영해왔고, 아직까지도 그 믿음이 이어져내려온다는 것만으로도 고석정의 민중적 가치는 수려한 풍광과 합쳐져 철원의 독보적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석정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피안사와 노동당사가 가까이 위치해 있다. 우선 도피안사로 먼저 발걸음 해본다. 도피안사는 명칭부터 참 불교적이다. '피안'이란 직역하자면 '저쪽 해안'이란 뜻으로 불교계에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말하자면 극락이고 성역이다. 도피안사의 첫글자 '도'는 도착할 때의 '도' 자이니 도피안사를 해석하자면 '피안에 도착한 절'이란 뜻이다. 그러나 정작 도피안사가 있는 곳은 북한과 DMZ를 접하는 지점이니 아이러니한 운명의 자림새다. 도피안사는 신라 말 경문왕 5년이었던 865년 우리나라에 풍수지리학을 도입한 승려로 유명한 도선선사가 향도 1000여 명과 함께 지었다. 오래도록 이어지던 도피안사는 6.25전쟁 때 소실되어버렸으나 1959년 15사단 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피안사는 그렇게까지 큰 절은 아니지만 도피안사에서 모시는 철조비로자나불상은 국보 63호 한국미술사에서 의미가 굉장히 큰 불상이다. 이름대로 철조비로자나불상은 철로 만든 철불이며 불상 뒷편에 새긴 명문에는 1500여 명의 향도들이 신라 하대 858년에 모금하여 조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정확한 연대까지 알 수 있기에 사적 가치까지 인정받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불교 부처들 중 최고신으로서 이 세상 모든 진리와 원리의 현현이다. 신라 중대에는 아미타신앙이, 신라 하대에는 비로지나불이 유행했다고 한다. 미술학적으로 신라 하대의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지역적 특색이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신라 하대 중앙정부가 제기능을 상실하면서 각 지방별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족들이 발호했고 호족들의 지지하에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도피안사와 철조비로자나불상 역시 철원지역의 로컬리티를 반영하며 탄생했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 비로자나불상은 아미타신앙에서 비로자나신앙으로, 석불에서 철불로, 경주에서 지방으로, 중앙귀족문화에서 지방호족문화로 이행하고 있음을 그 한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
보통 불상은 후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상은 크기도 인간의 신체비례와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매끈하고 탄력적인 몸매에 잔근육이 베인 튼실함을 보여준다. 여기에 철빛 피부는 건장하고 남성적이라 믿음직한 모습이다. 푸근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은 조용하되 신실한 무표정은 '진리'란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도피안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노동당사가 있다. 말그대로 노동당사는 한국전쟁 이전 조선로동당이 사용했던 당사이다. 조선로동당은 해방 후 소련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창당한 북한 기반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로, 현재 북한의 유일한 정당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다가 연해주로 활동지를 옮겨 이번엔 소련군 소속으로 활동하는데 이때 소련군 눈에 들어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직전 소련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입해 위도 38도까지 내려올 때 김일성도 같이 내려온다. 이미 일본의 패망은 거의 확정된 상황. 일본이 패전을 선고하면 다음은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의 공산주의 진영이 팽팽하게 부딪힐 거라는 건 모두가 예고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스탈린은 한반도를 공산화시킬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그 일을 맡아줄 한국인 공산주의자가 필요했다. 그 역할로는 당시 능력으로 보나 평판으로 보나 세력권으로 보나 국내파의 박헌영이 유일무이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선택은 당대 좌우익 독립운동가 거물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웬 김일성이란 소련의 일개 장교였다. 스탈린이 박헌영이 아니라 김일성을 선택한 이유는 박헌영이 너무 유능해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박헌영 같은 사람이 한국 공산주의의 전체 리더가 되면 언젠간 소련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주체적인 판단 하에 스탈린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스탈린이 별 것도 아닌 김일성을 키워주면 그 감사함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견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능력을 따져봤을 때 박헌영처럼 절대 못한다고 평가했기 때문에 체스판의 말로 쓰기에 더할나위 없었다.
김일성은 소련과 같이 한반도 북부로 넘어와 5가지 공산주의 계열 중 ‘갑산파’를 흡수하고 해방되고 한 2개월 후였던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은 박헌영한테 한반도 북쪽엔 이렇다할 조직이 없으니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비록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한반도 내 박헌영의 입김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일단 김일성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지부 같은 개념으로 박헌영보다 아래로 들어간다는 모양으로 시작을 했다. 김일성은 소련에게 능력을 증명해야하기 위해서 토지개혁이란 좋은 명분으로 지주와 자산가, 우익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의적이고 잔인한 숙청을 자행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예쁨을 듬뿍 받았고 1946년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한다. 김일성은 박헌영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가장 큰 3대 세력 중 하나였던 중국연안파를 흡수하고,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으니 당연하게도 3대 세력 중 소련파 역시 김일성에게 협조하면서 김일성은 지금의 ‘조선로동당’을 창당했다. 김일성과는 다른 공산주의 노선을 걷겠다는 박헌영도 한반도 남부에서 ‘남조선노동당’, 이른바 ‘남로당’으로 이름을 개칭한다. 그러나 남쪽에서 사횢의 활동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 박헌영은 결국 북쪽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조선로동당에 흡수되면서 지금의 북한 1당체제가 형성되었다. 철원의 노동당사는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로동당의 당사다.
아직 철원이 북한의 영토였을 무렵 조선로동당의 당원들이 인근 주민들의 노동력과 자금을 강제 차출하여 노동당사를 만들었다. 이 안에서 각종 고문, 사상교육, 지주 및 자산가들에 대한 사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뒷뜰엔 방공호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6.25전쟁을 거치며 노동당사는 폐허가 되어버렸고 전쟁 당시 화재에 의한 그을림과 총탄 자국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노동당사가 워낙 철원을 대표하는 안보관광지인 만큼 인지도가 높지만 막상 가보면 큰 건물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코스가 전부다. 그러나 폐건물 자체가 주는 낡은 파멸의 정서는 괜시리 철원의 찬바람과 함께 서릿발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자국과 상흔을 남아 이제는 생동감있게 느낄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상상하게 해본다. 저 총알자국에는 한국군이 쏜 총알의 자국도, 북한 인민군이 쏜 총알의 자국도 있을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누가 쏜 총알이든 결국 총알자국의 모양은 똑같다는 글귀가 나온다. 우리는 저 총알의 자국만 보고 누가 쏜 총알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저 참상만이 전해질 뿐.
6.25 한국전쟁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하려면 철원을 빠뜨릴 수가 없다.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했고 처절했던 전투가 철원의 백마고지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때 피냄새, 화약냄새, 폭음, 폭연 등이 끊이질 않던 고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이래 한국군과 UN군은 계속 밀리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크게 성공하며 전세는 뒤집혔다. 한국군과 UN군은 기세 좋게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중공군이 이른바 인해전술로 개입하면서 1951년 1월 4일 한국군과 UN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한다. 서울을 두고도 탈환전이 몇 차례 이루어지는 등 전선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었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미국이나 서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전쟁을 이끌어가봤자 아무런 소득이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1951년부터 휴전회담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휴전회담만 두고 2년이나 걸렸을 만큼 몇 번이고 회담이 결렬되는 등 합의문 작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무엇보다 양측 모두 휴전이 체결됐을 시 조금이라도 더 넓은 땅을 확보해갈 수 있도록 앞에선 휴전과 평화를 말하면서 뒤로는 강원도 고지에서 격렬한 전쟁을 지시했다. 그중에서도 철원평야의 생산성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서로 빼앗길 수 없었고 철원 곳곳의 고지에서 한 치의 땅을 빼앗길 수 없다며 가장 잔인하고 섬뜩하고 전투들이 멈추질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백마고지 전투였다.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철원-김화-평강 일대를 '철의 삼각지대'라고 부른다. 백마고지 전투는 이 '철의 삼각지대'에서 벌어졌던 최악의 전투로 손꼽힌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공군 2개 사단과 한국군 제9사단이 맞붙었던 전투다. 열흘간 이 고지 하나의 주인이 무려 24번이 바뀌었고 30만 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치적으로 보니 당시 전투의 처참함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중공군은 마약을 투약하면서까지 덤벼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화약들이 오고가며 고지의 식생들이 전부 초토화되다보니 그 모습이 마치 하얀 말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더불어 당시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국군 제9보병사단은 현재 백마부대라고 불린다. 제9보병사단은 호국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부대이지만 후일 신군부 쿠데타 당시 노태우가 자의적으로 서울로 투입시켜 쿠데타에 가담했던 오욕을 가지고도 있다.
백마고지전적비에 도착하면 하얀 말의 동상이 두 앞다리를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힘차게 약동하고 있다. 그 뒤로 백마고지전투의 설명안내문이 있고 그 옆으로 가면 태극기들이 도열하여 당시의 전사자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기념하러 온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다. 언덕을 쭉 올라가면 기념관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넓디 넓은 철원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백마고지전적비가 있는 이 언덕은 백마고지가 아니다. 백마고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언덕일 뿐이다. 백마고지는 민간인통제구역에 있어서 접근할 수 없다. 백마고지전적지에서 한 눈에 보이는 저 각지고 둔탁한 백마고지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다. 하필이면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 철원에 왔다. 다른 곳을 여행하고 있었더라면 추위에 벌벌 떨며 빨리 발걸음을 옮겼을 텐데 왠지 모르게 계속 백마고지를 처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아직까지도 철원의 북쪽 일부는 북한 땅이다. 따라서 철원에서는 북한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가 있다. 갈 수는 없고 오직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의 땅을 구경하러 철원평화전망대로 향한다. 철원평화전망대를 가기 위해선 다시 고석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철원평화전망대와 월정리 폐역은 민간인통제구역이라 마음대로 갈 수 없고, 고석정에 있는 철원관광안내소의 지시에 따라 허가를 받은 후 다같이 이동해야 한다. (차량이 있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해설사 한 분의 차량이 맨앞에서 인솔해주신다. 그렇게 철원평화전망대에 먼저 도착한다. 철원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내려 이제는 도보로 해설사 분과 함께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도보 옆의 숲에는 '지뢰주의'라는 팻말이 달려 있다. 6.25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 지뢰라니 사실 그 위험성이 피부로 와닿을 만큼 섬뜩하다는 감정은 없다. 현재 비무장지대에 묻혀 있는 지뢰 개수가 무려 100만 개가 넘는다고 하며 지뢰들을 전부 해체하는 일은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해설사 분이 인류 최초의 지뢰가 '똥'이었고 실제 옛 전투들에서 똥을 지뢰 기능으로 사용했다는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시니 어느새 벌써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 건물로 들어서 2층 교육장에 들어가면 간단한 안보영상을 시청하고 넓은 창 바깥으로 북한을 바라볼 수 있다. 북한의 철원도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북한주민의 마을을 볼 순 없고 북한 초소와 날이 좋으면 초소를 지키는 북한군을 볼 수는 있다. 우리에게 생소하고 이목을 끌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관리되지 않아 우거진 숲과 산과 산의 능선들이 겹쳐져 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 능선들과 고지들의 별볼일 없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고지 하나하나를 보기도 하고 넓게 조망해보기도 하면서 적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우리 집보다 가까운 북한을 담담하게 생각해본다. 남한과 북한이 대치하는 이 현장이 만들어지기까지 너무 괴로운 피들을 흘리고 듣기 싫은 총성을 내야만 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멀리 김일성고지와 낙타고지에서는 시체들의 피냄새와 썩은내가 진동했다고 하며, 저 고지들을 연결하는 능선에서는 비가 올 때마다 시체들의 피가 흘러 내려 '피의 능선'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 맨 왼쪽에는 백마고지도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나와 초소를 지키는 군인의 시선이 일치한다. 단 군인들은 경계의 목적으로 우리 관광객들은 호기심의 심정으로 북한 초소와 북한 능선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가 보이진 않겠지만 북쪽의 군인들도 우리를 향해 눈을 치켜세우고 있겠지. 자세히는 안 보여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쌍방향의 시선을 생각하니 묘하다. 우리가 저쪽 우리 민족을 신기해하듯 저쪽도 이쪽 우리 민족을 궁금해 하겠지.
갑자기 눈발이 거세진다. 눈으로 인해 시야가 흐릿해지고 북한 경치도 가려진다. 마치 분단이라는 현실을 나한테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마냥. 시간과 공간이 희미하게 형체를 가지고 가벼운 중압감으로 내려앉는 느낌이다. 영국의 처칠은 이런 말을 했단다. "전쟁을 할 때에는 결단이, 패배를 했으면 반항이, 승리를 했을 때에는 아량이, 평화시에는 선의가 필요합니다."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북한을 구경할 때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진 않지만 내가 유독 찾아나선 곳이 있다. 바로 궁예의 태봉 왕성터다. 철원은 궁예가 건국한 태봉의 수도였다. 그리고 태봉의 왕성이 지금의 비무장지대에 걸려 있어서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 터로 보이는 흔적조차 안 보이자 해설사분께 물었더니 왕성 일대가 관리가 되지 않아 숲이 우거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왕성 터를 가리고 있는 숲을 가리켜주었다. 정말 요리조리 자세와 위치를 바뀌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전시실에 있는 모형으로 만족해야 했다.
궁예는 통일신라 말 신라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세우며 견훤의 후백제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연 장본인 중 한 명이다. 기록에는 궁예가 버림받은 신라 왕족 출신이라고 하며, 당대에도 궁예는 스스로 신라 왕족 출신임을 표방했다. 어린나이에 버려졌는데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했던 유모가 아이를 던졌고 그때 나뭇가지에 눈을 다쳐 평생 애꾸눈으로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궁예가 진짜 신라 왕족이라는 증거나 흔적은 없다. 그저 궁예 개인피셜이었기 때문에 입증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입증이 되질 않으니 당대에도 믿었던 모양이다. 궁예가 고아로 자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고아였던 궁예는 어린 시절 절로 출가했으나 야심이 남달랐던 궁예는 절에서 나와 경기도 안성의 호족이었던 기훤에게 의탁했다. 단 기훤은 궁예를 중용해주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궁예는 기훤 세력에서 이탈해 강원도 원주의 호족 양길에게 간다. 강원도 원주를 기반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강력한 실세였던 양길은 궁예를 크게 환대해주며 세력을 더욱 불려나갔다. 양길은 궁예더러 강릉을 토벌하게 하는데, 강릉을 점령한 궁예는 오히려 강릉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당연지사 한반도 중북부의 패권을 두고 궁예와 양길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899년 경기도 남부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궁예와 양길은 경기도 안성 비뇌성에서 결전을 벌여 양길은 패퇴했다. 승리한 궁예는 한반도 중북부의 유일한 대세력가 겸 대호족이 되었고 901년 후고구려를 선포했다.
궁예가 그토록 거대했던 양길의 세력을 부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기까지 궁예에게 절대적인 기반이 되어준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의 지지가 없었으면 출신도 애매한 궁예가 성장할 수 없었을 텐데, 바로 황해도 기반의 패서호족들이었다. 패서호족의 도움이 워낙 커서 궁예는 패서호족들을 우대해주어야 했고 근거지도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겨야 했다. 패서호족들은 대부분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해서 궁예도 개인과는 별 연관도 없는 '고구려'를 국명으로 삼아야 했다. 대표적인 패서호족으로 왕건의 집안이 있었다. 왕건의 활약으로 패서호족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부상했고 전제군주의 권력을 원했던 궁예는 패서호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이름도 '마진'을 거쳐 911년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는 전제군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이 종교, 바로 불교였다. 궁예는 미륵신앙을 이용해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며 관심법을 사용한다며 패서호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죽여갔다. '마진'과 '태봉'도 불교식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과도한 왕권강화개혁에 궁예는 아내와 아들들까지 무참히 살해한다. <고려사> 기록에는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뚫어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라고 적혀 있다. 물론 고려는 궁예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악의가 다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예는 강도 높은 왕권강화책으로 인해 정치적 통합에 실패했고, 불교를 잘못 사용한다며 불교계로부터도 배척을 당했다. 불만을 품은 패서호족들은 왕건 곁으로 모여 918년 왕건은 궁예를 내쫓는다. 왕건은 태봉의 궁성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저 숲에 가려진 궁성 터에서 왕건은 즉위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 안 가 왕건은 패서호족의 세력지였던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명도 다시 '고구려' 즉 '고려'로 바꾼다.
공식 역사서에는 쫓겨난 궁예는 도주 중에 백성들로부터 맞아죽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궁예는 민심도 잃은 것으로 보이는데, 철원 향토사에서 전해지는 바로는 궁예가 본인 지지세력과 끝까지 왕건과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철원에서만큼은 철원을 한 국가의 수도로 삼아준 궁예를 나름 변호해주고 긍정적으로 기억하려 한다. 역사란 전해지는 방식,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이토록 다채롭게 해석된다.
모든 국가가 망했으니 모든 국가의 수도들은 다 망국의 왕도다. 단 태봉의 궁성은 이제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하고 관리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니 '망국의 왕도'라는 분위기가 유독 강하게 다가온다. 운명의 심판인지, 기구한 운명의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궁예에 대한 오늘날의 대우는 아주 냉정하게 박하다.
DMZ안보관광은 철원평화전망대를 떠나 월정리역으로 이동한다. 분단 전까지만 해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정차역 중 간이역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분단이 되면서 더 이상 더 나아갈 곳이 없어져버렸다. 현재는 당연하게도 폐역이며 지금의 간이역은 1988년 복원한 모습이다. 뒷편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망가진 인민군의 열차가 전시되어 있는데 너무 오래된 철이라 피부에 닿으면 심각한 균이 옮을 수 있다고 해서 만지는 게 금지되어 있다. 저 찢겨진 열차의 철들이 역사의 증거고 과거의 흔적이다.
'달이 비추는 우물'이란 뜻에서 유래한 마을의 이름이 참 서정적이다. 이렇게 어여쁜 이름의 마을이 지금은 군사분계선이라 마음대로 찾아오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아까부터 내린 눈이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전망대에 있었을 땐 시야를 가렸지만 여기 월정리역에선 은은하게 운치를 만들어준다. 지금 여기선 동화 같은 서정성과 전쟁의 역사를 품은 군사시설의 엄혹함이 공존하고 있다.
월정리역을 끝으로 DMZ안보관광은 마무리 된다. 월정리역에서 다같이 이동해 노동당사에서 해산한다. 가는 내내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에 해산하기 전까지 단독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노동당사로 가는 도중 분명 뻥 뚫린 도로에 우리 말고는 다른 민간차량들은 없을 텐데 갑자기 앞차들의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진다. 무슨 일이지 고민하다가 금세 인솔차량을 이끄시는 해설사님의 센스에 감탄하게 된다. 노동당사처럼 과거 광복 직후부터 분단 직전까지 사용되었던 옛 폐건물들 중 민통선 내부에 있어서 관람할 수 없는 곳들을 일부러 지나치시면서 비록 차에 내릴 순 없지만 차 안에서라도 구경할 수 있게 속도를 늦춰주신 거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을 여행한 비밀스러운 기분으로 당일치기 철원여행을 마친다.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꺾으면 발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 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 냄새가 난다
-정춘근 <지뢰꽃>
***철원 DMZ안보관광 코스에는 원래 '제2땅굴'도 함께 관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제가 갔을 때는 제2땅굴 코스는 빼고 평화통일전망대와 월정리역만 방문했습니다.
철원여행기를 통해 철원의 거칠고 황량한 이미지만 너무 부각시킨 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내가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건 철원의 생명력이다. 철원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곳이다. 우선 철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새도래지이다. 철새 중에서도 두루미(학)들이 겨울마다 철원을 방문한다. 두루미들은 원래 추운 시베리아 지역 혹은 우리가 만주라고 불리는 곳에 서식하다가 겨울이 되면 비교적 기온이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철원으로 모인다. 겨울철새인 두루미는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는 새들이 아니다. DMZ안보관광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다보면 민통선 부근이라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두루미 떼들을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다닌다. 우아하면서도 앙증맞은 이 고고한 새들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렇게도 좋아했을 만하다. 더 귀여워 보이는 건 이 두루미들은 가족단위로 움직여서 딱 몸크기로만 부모와 자식 구분이 된다는 거다. 해설사분의 말에 의하면 두루미들은 인간처럼 일부일처제라고 한다. 오로지 한 명하고만 짝짓기를 해서 새끼를 낳고 항상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는데, 저 두루미 가족들은 추운 철원 땅에 따뜻하게 핀 꽃망울들 같다. 두루미뿐 아니라 철원은 독수리도 유명한데, 철원에서 병역을 치른 군필자들이 사람만한 독수리를 봤다는 회고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철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것. 풍부하고 품질 좋은 쌀이다. 어느 마트를 가든 찾아볼 수 있는 쌀 브랜드 '오대쌀'의 출처가 바로 철원이다. 철원을 빼앗긴 김일성은 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철원평야는 우리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생산력을 갖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쌀창고다. 언뜻 화산지대가 비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힘들 수도 있다. 실제 같은 화산지형인 제주도나 울릉도에서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논농사를 짓기엔 적합하지 않다. 반면 철원에는 한탄강이 있다. 가뜩이나 열하분출로 인해 철원은 평야지대인데 이곳에 한탄강이 범람하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흙을 가져다날라준다. 여기에 오랫동안 이어져내려온 관개시설과 철원 특유의 큰 일교차 덕에 우수한 쌀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따라서 철원 어디 백반집에 들어간 오대쌀의 진면목을 맛 볼 수 있다. 신철원 쪽에 시장이 있어 가장 내 후각을 자극하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공기를 주문한다. 찰지고 씹는 맛이 예술이 오대쌀. 혹시 이 쌀이 오대쌀이 아닌데 나 혼자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싶어서 주방 쪽을 몰래 봐보니 오대쌀 상표가 적힌 자루들이 쌓여 있다. 밥이 맛있으면 세상 그 어떤 반찬도 맛있다. 철원은 이토록 강한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해주는 곳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최명 <벽초, 임꺽정 그리고 나>
'임꺽정'을 다룬 가장 유명한 창작물은 벽초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일 겁니다. 연재되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죠. 그런데 벽초 홍명희가 월북작가인지라 한동안 소설 <<임꺽정>>은 한동안 금서였죠. 지금은 여러 출판사에서 저마다 기준으로 엮어 재간하고 있답니다. 지은이 최명 작가님은 <<임꺽정>>이 금서였던 시절부터 책을 비밀리에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 우연히 집에 있던 책을 발견하고는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어 평생토록 읽고 또 읽었다고 합니다. 본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하더군요. <<임꺽정>>과 벽초 홍명희의 연구자는 아니지만 국내 원톱 덕후라고나 할가요. 이 책은 최명 작가님이 그토록 닳고 헤지도록 읽은 <<임꺽정>>과 저자 벽초 홍명희에 대해 분석하고 해설한 책입니다. 전문적인 연구글이라기보단 골수팬의 주석 같은 느낌이죠.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원작이 워낙 방대한 대하소설이라 다소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역사적 팩트로는 철원의 고석정과 임꺽정이 별 상관이 없다지만 그럼에도 민중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임꺽정이 아직도 고석정에 살고 있으니 철원, 벽초 홍명희, 소설 <<임꺽정>>,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민중들의 삶과 생활을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장훈 감독의 <고지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좋은 전쟁영화는 의도하지 않아도 반전영화의 주제를 전달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극찬받는 할리우드의 명작 전쟁영화들을 보면 하나 같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반전영화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쟁영화들은 (대부분 6.25전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호국수호의 숭고함, 전쟁에 대한 낭만적 미화, 가족주의에 치댄 신파 등이 대다수인 듯합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이 적당히 가미된 가운데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말하는 <태극기 휘날리며>도 있지만 장훈 감독의 <고지전>은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유일한 반전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휴전협상이 오가던 사이 고착화된 동부전선에서 단 한 개의 고지라고 점령한 채 휴전을 협상시키기 위해 군인들을 폭음과 죽음의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던 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고지전>을 이미 보신 분이라면 철원에서 목도하는 저 고지들의 아우성이 떠오를 거고, 철원여행을 다녀온 후 영화를 보신다면 그 고지의 섬뜩함이 느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