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여행하다.
땅은 그곳과 인연을 맺은 사람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지, 단지 경치가 빼어나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김홍도의 스승으로 유명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표암 강세황이 남긴 말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행을 갈 때마다 머릿속에 되뇌이고 가슴속에 새기며 내 여행의 철칙으로 삼는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곳을 다녀가거나 머물었던 사람들의 사연과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대지 위의 모든 공간들은 인간들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인생에, 한 시대의 생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세계와 인간의 교류관계는 쌍방향이다.
이번 여행은 광명시와 과천시이다. 두 도시 모두 수도권의 대표적인 근교위성도시다. 광명은 그린벨트로 묶여있으면서도 위성도시로 발전해 주거기능을 맡고 있으며, 과천은 여러 행정부처들이 있는 행정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저 사람들이 사용만 할 뿐 별다른 그 지역과의 왕성한 왕래가 없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몇몇의 특별한 예술가들에게 각자만의 예술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곳이며, 여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토대로 인연을 맺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광명과 과천에서 인간이 그곳의 땅과, 대지와, 지역과 맺은 인연을 살펴보러 떠나자.
광명동굴은 한국관광 100선에서 항상 순위권에 드는 관광명소로 연간 200만 명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유원지와 맞먹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동굴 관광동선도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으며 한 바퀴 도는데 40분 가량 걸리며 구간구간이 전부 유익하고 볼거리 천지, 포토존 천지다. 가족, 친구, 연인, 혼자서 가도 모두가 만족할만한 관광지가 별로 없는데 광명동굴은 누구랑 가든 즐기고 나올 수 있는 곳이다.
동굴은 형성되는 원인에 따라 석회동굴, 용암동굴, 해식동굴로 분류되지만, 광명동굴은 자연적으로 만든 동굴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동굴이다. 광명동굴은 예전 시흥광산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한반도의 광물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개발됐다. 광명동굴이 있는 광산은 금, 은, 동, 아연 등 여러 종류의 광물의 맥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아마 태평양 전쟁 때 더 심했겠지만) 광부들은 대부분 값싼 노동력에 팔린 한국인들이었으며 일제의 잔혹한 채찍질 아래서 일해야만 했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자 차례차례 한국의 경제권을 수탈하기위한 여러가지 법령을 선포하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에 선포된 '조선광업령'은 1915년 발표되어 1916년부터 해방 전까지 시행되며 천문학적인 규모의 광물자원을 수탈해갔다. 조선광업령에 따르면 한국 내 광업권은 조선총독부가 법인한 자에게만 수여되며 당연하게도 거의 대부분 일본인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기존에 광업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들은 모조리 총독부에 그 권한을 박탈당했다. 광산에서 보이는 한국인이라곤 끔찍한 노동환경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뿐이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그 해에 광물출원건수가 436건에 불과했던 1910년에 비해 고작 10년 후인 1920년엔 무려 1만 건으로 증가했다고 하니 일제의 지하자원 수탈 규모가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새삼 분에 차오를 뿐이다. 일제의 지하자원 수탈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부턴 훨씬 심각해졌고 수탈한 철광석만 몇 백만 톤이며, 석탄의 경우 몇 천만 톤에 이른다고 한다. 채굴된 금의 경우도 대부분이 총독부 소유 은행으로 들어가 일본 본국 은행으로 이송됐으니 한국의 지하자원은 문자 그대로 날강도 당했다.
해방 이후 전쟁이 터졌을 땐 피난처로 역할을 하다가 산업화 시대에도 광명동굴은 그대로 사용됐다. 비록 해방 후 자원은 한국 경제에 투입되어 큰 역할을 했다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개선되지 못했다.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가스 누수 사고나 천장 붕괴 사고 등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비단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저 어둡고 폐쇄적인 갱도에서의 매일매일은 아주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동굴 속으로 내딛은 첫발, 돌 깨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아주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갓난아이의 울음, 목덜미를 스치는 채찍과 고함, 동굴을 뒤흔드는 폭발음까지. 눈앞을 번쩍이 지나가는 근대의 섬광이었다.
1972년 광명동굴은 공식적으로 폐광되었고 이후엔 인근 소래포구에서 만들어진 새우젓의 창고로 이용되었다가 2011년 경기도 광명시가 동굴을 매입해 지금의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비좁은 갱도를 빠져나오자 여러 사람이 모여 있기 좋은 공간이 나타났다. 대원 하나가 탄성을 지르며 커다란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인간이 만들어낸 광명동굴의 역사! 앞으로의 100년을 설계해야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동굴은 일년 365일 내내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발효식품들을 저장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인데, 현재 전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광명동굴을 이용하고 있다. 와인구간에 가면 무료시음도 할 수 있고 구매까지 가능하다.
얼마 전 바닷가에 떠내려온 고래 뱃속을 열어보니 무수히 많은 양의 플라스틱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플라스틱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과 유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재 플라스틱은 지구 환경 전체를 위협하는 외계인의 침공과도 같다. 광명동굴 밑으로 내려오다보면 무작위로 버려져 어쩌지 못하는 플라스틱을 모아 여러 예술가들이 플라스틱을 소재로 만든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가 있다.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갤러리 전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광명동굴을 방문하면 꼭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를 둘러보고 환경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 청춘을 상징하며 요절한 시인을 꼽으라면 거의 대부분 윤동주를 떠올릴 거다. 최근 신조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나라 시인들 중 '힙'한 시인들과 시집들이 있는데, 카페나 복합문화공간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힙한 시인들 중엔 늘 윤동주와 백석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한 때 멋짐을 추구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늘 끼고 다니던 시인의 시집이 있었다. 바로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이다. 그러나 윤동주나 백석의 시와는 달리 기형도의 시는 음울하고 암담하고 어둡다. 그런데도 그렇게 젊은 세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1960년 지금의 경기도 광명에서 자란 기형도 시인은 80년대의 대표적 시인이다. 태어난 곳은 연평도이지만 사실상 반평생을 지금의 경기도 광명에서 자랐다. 기형도 시인의 어린시절과 가정사는 대단히 우울했다.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친누나 역시 교통사고로 죽는 비운의 사고를 겪는 등 기형도 시인은 암울했던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친했던 누나의 죽음은 기형도에게 큰 충격이었고 누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쓴 시가 <제망매가> 라는 시입니다. 향가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을 앓는 중풍환자로 태어나
전신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더군다나 그가 자랐던 지금의 경기도 광명은 기형도 시세계에 공간적으로 큰 배경을 제공했다. 당시 경기도 시흥에 속해 있었던 경기도 광명에는 큰 공장들이 있었고 동네 사람들 다수가 남자든 여자든 공장노동자들이 많았다. 거기에 인근 안양천에서 형성되는 안개는 도시 자체를 회백색의 어두운 공간으로 기형도 시인에게 인식된 듯 하다. 그래서 기형도의 시 중에서는 공장과 공장을 다니는 공장노동자들을 다룬 시들이 굉장히 많다.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때로는 그들을 연민하고 또 때로는 그들을 조소한다. 기형도의 시에서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는 평도 있을 정도다. 성신여대의 박선영 교수는 "기형도 시는 삶의 어두운 한 극한을 직면하고 비극성을 소화한 인간주체성의 한 예"라고도 말했다.
20살 때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기형도는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서 활동하며 공식적인 시인으로 활동했다. 기형도는 일반적으로 그의 시에서 자아를 죽이려고 한다고 해석된다. 현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듯하다. 이는 너무나도 암담하고 개선가능성이 없는 현실 앞에서 존재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형도의 시에서는 서사들 간의 연속성이 없다. 이를 두고 '무시간성' 혹은 '두서없이 나열된 이미지의 중첩' 이라고 표현한다. 이건 시세계의 정조를 이루는 비극성이 기형도 개인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비극성이 과거와 미래 모두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기형도의 대표작 중 하나는 <빈 집>이라는 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는 공간이 대단히 중요한데 한국외대 장준영 교수는 <빈 집>에서의 '빈 집'은 "자아를 세계와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폐쇄적이고 고체화된 공간"이라며 정서적 갇힘으로 인해 괴로움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기형도의 시에서 나오는 공간은 전부 허기와 공포와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
또 다른 대표작은 <백야>라는 시다.
눈이 그친다.
仁川(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字幕(자막)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農具(농구)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 닫힌 商會(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軍用(군용)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마찬가지로 백야 현상으로 인해 기형도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안개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시로 경원대 김삼주 교수는 "퇴락한 공간에서 마모된 인간이 지향 없이 걸어가는" 시라고 평했다.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기형도 시인은 첫 시집을 발간하는 도중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 3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던 해 1989년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그의 유고시집을 내주니 이 시집이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다. 30대 직전에 요절했다는 점과 유고시집이 유일하다는 점이 윤동주와 기형도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기형도의 시가 그토록 어두우면서도 젊은 세대의 열렬한 환호를 받은 건 현 산업화의 세태가 대단히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추되 누구도 그 이야기를 이 정도의 날선 어조로, 그리고 이 어두운 세계를 이 정도로 날 것 그대로 표출하는 시인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기형도의 시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명감 투철한 20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건 오직 현실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데 있다.
-김현 <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
중얼거림은 소외된 자의 넋에서 무자각적으로 흘러나오는 자기 독백의 소리이다. (중략) 이 중얼거림의 행위는 기형도의 시 세계의 총체적 의미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행위다. 거두절미하고, 기형도의 시는 바로 중얼거림의 시인 것이다!
-장석주 <기형도 혹은 길 위에서의 중얼거림>
충현박물관은 조선 중기 명재상으로 이름을 알렸던 오리 이원익 선생의 집을 그 가문에서 사립박물관으로 운영 중인 박물관이다. 오리 이원익은 선조-광해군-인조 세 국왕을 모신 신하로 당파로는 남인 쪽의 영수였다. 오리 이원익은 광해군과 인조 양 정권 때 모두 영의정을 맡았다는 것을 보면 정말로 놀랍다. 인조 정권은 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수립된 정권임에도 양 정권에서 모두 영의정으로 재임했다. 붕당을 막론하고 주변 정치인들로부터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이질 못하겠고, 이원익은 속일 수 있으나 속이기 싫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원익은 대외관계가 상당히 원만했다. 임진왜란 시절 주로 평안도에서 백성들을 순무하고 의병을 격려하는 등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관리였으며, 류성룡마저 이순신을 보호해주지 못할 때 유일하게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사람도 이원익이었다. 마르지 않는 미담의 이원익은 재상으로서 최소한의 규모는 갖춘 집에서 살라며 인조가 직접 집을 하사해주었을 만큼 청렴의 아이콘이었다.
이원익의 업적은 대동법으로 역사에서 기억되고 있다. 광해군 시절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이원익은 광해군에게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물제도를 폐지하고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원익의 대동법은 토지 결수당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토지, 즉 재산이 많으면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재산이 없으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제도였다. 당연히 수많은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가 따랐다. 광해군은 이원익의 편이었으나 양반들의 거센 반대로 대동법을 경기도에만 시행했고, 인조 시절 이원익은 재차 대동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인조는 대동법의 범위를 일부 더 확장시켰습니다. 최종적으로 대동법이 전국 단위에 시행된 것은 이원익의 건의로부터 100년 이후의 일이지만 오래된 악습이 사라지기까지 그 시동을 켠 장본인이었다. 실은 이원익의 대동법조차 처음 거론된 개혁정책은 아니었다. 특산물 공납은 일찌감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폐단이었다. 이미 조광조, 이이, 류성룡 등이 '수미법'이란 이름의 대동법을 제창했으나 수용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이원익과 광해군이 실현해보였다. 개혁이란 하루아침에 칼로 무를 베듯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큰 변화엔 용기와 과감함을 갖춘 사람들의 연이은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북유럽식 가구 및 실내디자인 스웨덴 업체 이케아 1호점이 한국에 최초로 자리잡은 곳이 경기도 광명이다. 서양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린 북유럽 특유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아시아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케아는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이니셜과 그가 태어난 농장의 이름 엘름타리드(Elmtaryd)와 도시의 이름 아군나리드(Agunnaryd)의 첫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1943년 스웨덴에서 설립한 이케아는 현재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다.
미니멀리즘이란 각 예술 분야별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조로, 모더니즘의 일환이다. 분야마다 모습은 제각각이겠지만 기본적으로 과함을 배제하고 순수성을 지향하는 공통의 본질을 가진다. 유홍준 교수는 "작가의 감정을 배제하여 관객의 감정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는 의도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미학적 특질 덕에 이케아의 미니멀리즘 실내디자인과 가구, 그리고 건축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듯하다. 디자인과 건축의 미니멀리즘 모두 모더니즘 예술을 주도했던 독일의 시각/조형예술창작학교 바우하우스로부터 기인한다. 추상주의를 가장 숭고한 예술적 방법론으로 표현해내려던 네덜란드의 '데 스틸' 그룹 멤버들이 바우하우스의 교사진으로 있으며 단순성과 물성의 관계를 가르치며 미니멀리즘의 태동을 자극했고,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역임한 적도 있던 독일의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르 로에는 미니멀리즘의 건축양식을 완성시켜 세계적인 미니멀리스트 건축가들을 탄생시켰다. 순수주의로 평가받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르 로에는 재료의 물성을 한껏 드러내는 디자인으로 건축을 설계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이후에는 많은 미니멀리즘 건축 거장들이 전세계에 두루 분포하고 있다. 건축과 디자인은 상호작용하며 미니멀리즘 분야의 확장을 꾀했다.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디자이너인 독일의 디터 람스는 모든 미니멀리즘 디자이너들의 존경을 받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은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미학을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단초이다.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3.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5.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6.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
7.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
10. 좋은 디자인은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
좋은 디자인은 비주얼로만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닌 기능과 주변과의 조화와 함께 동반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북유럽의 건축가 혹은 디자니어들로는 핀란드의 알바 알토, 스웨덴의 군나르 아스푸룬드 등이 있다. 최근 스웨덴의 프리다 람스테드는 인테리어 분야에서 큰 인기와 지지를 받고 있다.
1일차의 마지막 코스는 전통재래시장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꼭 전통시장에 들르진 않지만, 전통재래시장은 어디든 방문하면 참 정겹다. 그중에서도 광명전통시장은 광명시에서 강하게 밀고 있는 전통재래시장이다. 광명전통시장은 광명시가 시흥시로부터 독립하기도 전이었던 1970년대 형성되어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워낙 오랜 시장이다보니 광명 현지주민들과 상점의 사장님들끼리도 안면이 익숙한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광명전통재래시장을 가기 위해선 준비물이 있다. 바로 텅 빈 위다다. 재래시장의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길거리 음식일텐데 광명전통시장은 유독 맛난 먹거리가 즐비해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치기에 계속 생각날 것만 같아 발걸음이 느려진다. 특히 홍두께칼국수와 칼제비는 꼭 먹어보자.
둘째날은 과천 여행이다. 그 첫번째 여행지로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으로 향해본다. 한국사의 4대 서예가를 꼽으라면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전기의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후기의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고 한다. 원래 한자를 통해 예술을 구현했던 서예라는 예술장르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총 5가지 양식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탄생시킨, 그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는 서예 추사체는 5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신의 경지에 이른 필체라고 평가받는다.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로 유명하지만 문예사에 있어서 한국사에 가장 괄목할만한 흔적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비단 서예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대스승으로 군림했었다. 그의 서예가 뛰어난 점은 단순히 형식적인 노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정신이 오로지 한 획 한 획에 고통스럽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추사 김정희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바로 '고증'이다. 추사 김정희는 고증에 미친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 청나라와 조선의 학문적 교류의 물고를 본격적으로 추사 김정희가 튼 이래 추사는 평생을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고증학에 전념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민족문화 창달에 힘썼다. 옛날 비석, 옛날 문헌 등을 검토하고 고증하는 과정에서 옛 성현들의 글씨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이 추사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북한산에 있는 비석이 신라 6세기 진흥왕 당시 진흥왕이 직접 지었던 순수비였단 사실을 밝혀낸 사람이 추사 김정희였다. 조선 후기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섰던 단 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가 일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과천이다. 과천에 오기 전 추사 김정희는 북청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추사는 과천을 말년의 기거지로 삼았다. 추사의 아버지가 과천에 마련해놓은 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희의 아버지는 이 별장을 '과지초당'이라고 불렀고 추사는 북청 유배가 풀려나자 이곳 과지초당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래서 과천생활을 하던 당시 추사의 모든 낙관에는 '과'자가 꼭 들어간다.
과지초당에서 말년의 추사 김정희는 제자들과 교류하고 본인 스스로도 공부와 서예훈련에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과천시절 소당 김석준이라는 20대 서예가를 특별히 아꼈다. 좀처럼 타인을 위해 서예를 써주지 않는 추사 김정희가 소당 김석준에게는 자신의 필서는 물론 좋은 벼루가 생기면 선물을 해주곤 했다.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유명한 이하응 역시 자신의 난초그림을 과천에 있던 추사에게 검증을 부탁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 엄격하게 독설을 날리고 혹평으로 유명했던 추사는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보고 경이로운 그의 실력을 경탄하면서도 부족한 점을 꼬집어 주며 부단히 노력할 것을 조언했다. 이때 추사가 이하응에게 건냈던 말이 퍽 인상적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도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추사도 다 늙은 말년이었기에 상당히 쓸쓸해하고 외로워한 듯 보이며 그래서인지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고 젊은 청년들과 이야기나누기를 그렇게도 즐겼다고 한다.
과천 시절 추사 김정희의 글씨 작품 몇 가지를 감상해보자. 이미 말했듯 추사는 서예 5가지에 모두 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추사체를 완성시켜서 더욱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가 과천시기였다.
추사 김정희는 과천에 살면서 가까운 봉은사를 많이 다녔다. 한번은 봉은사의 스님이 추사에게 현판으로 걸 글씨를 부탁했고 추사 김정희는 '판전'이라는 현판을 만들어주었는데 이 작품이 추삭의 유작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스스로 본인의 말년 추사체를 "대교약졸"이라고 표현하며 '졸함'의 미학을 으뜸으로 삼았다. '대교약졸'이란 거대한 마스터피스는 졸해보인다는 뜻이다.
옛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과지초당은 그대로 복원되었으며 동일 장소에 추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지하1층까지 포함하면 총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지막지하게 넓지 않아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비록 고작 3개의 층을 돌고서 추사 김정희의 모든 걸 이해할 순 없겠지만 추사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말년의 대예술가가 느꼈을 외로움에 감정이입해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추사박물관의 지하 1층은 추사 김정희가 아닌 아주 특별한 두 일본인 학자 부자를 위한 공간이다. 추사 김정희란 대예술가에 대한 최초이자 제대로 된 연구작업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로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의 동양철학자였다. 청나라의 고증학을 전공했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청나라 고증학을 이어받은 추사 김정희에게로 연구범위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청나라 고증학자들과 추사 김정희가 주고받았던 학술적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추사 김정희를 한국이 아니라 당시 동양에서 고증학의 1인자였다고 칭할 정도였다. 이렇게 추사에게 빠진 후지쓰카 지카시는 미친듯이 추사의 서예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 그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가 그의 아버지 작업을 이어받았다. 2006년 과천문화원의 최종수 원장이 일본으로 넘어가 당시 90세 이상이었던 아키나오를 만나 추사 학술대회 참가를 권했는데, 너무 늙은 아키나오는 한국으로 넘어올 순 없었고 대신 그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수집했던 추사의 작품 전부를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일찍이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기증을 원했으나 먼지 속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인이 계속 추사를 연구하는데 이용해주기를 바랍니다.
아키나오가 기증한 자료는 책 2750점, 작품 약 118개의 분량이었다. 추사가 생전에 편차냈던 고서 약 2500책, 근대 양장본 약 1500책, 후지쓰카 지카시 개인의 연구 자료 1000점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의 기증이다. 이 기증된 자료를 토대로 탄생한 박물관이 지금의 추사박물관이다.
흔히들 MMCA라고 약자로 줄여 부르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나라에 총 4개가 있다. 1973년 최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86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3년 삼청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그리고 2018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그것들이다. 서울관이나 청주관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져 현대적인 미술 중심이라면 과천관은 한국근현대미술 전시의 모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한 곳으로 한국의 성곽과 봉화대의 전통양식을 투영시켰다고 한다.
본격적인 전시회장으로 들어가기 전 1층 홀에는 과천관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이 우뚝 군림하고 있다. 현대예술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파격의 대명사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은 과천관 개관 때부터 쭉 계속 전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백남준 <다다익선>이 있는 원형전시장을 돌면서 2층과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3층까지 올라가서 밑으로 내려오는 루트가 나에겐 가장 잘 맞았다.
한국의 현대예술은 당연하게도 근대예술로부터 기인한다. 격동의 시기였던 한국의 근대시기에 형성된 한국의 근대미술은 한국만의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전신이면서도 그 자체로 역사적, 미학적 다양한 층위의 독자적인 매력을 가진 시대였다. 서양화기법이야 조선 후기 때부터 서서히 조선으로 유입되었으나 구한말 본격적으로 한국의 미술가들이 서양의, 특히 일본유학을 통해 유입해온 서양의 모더니즘 기법이 한국 근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조선의 마지막 전통미술 세대이자 한국근대미술 그 경계지점 어딘가에 위치하며 두 시대를 잇는 심전 안중식 화가와 그의 제자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희동 화가의 주도로 한국의 근대미술이 태동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점점 난숙해지고 발전해간다. 1911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 서화미술회가 조직되어 근대미술의 교육적 기반이 마련되는가 하면 회장 안중근의 영향력이 제자들에게 퍼져갔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가 생기고 주로 경성, 대구, 평양 등지에서 미술교육이 활성화되었지만 서화미술회는 친일파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고, 서화연구회는 조직적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어려운 시기 한국 미술인들을 규합해줄 전국적인 단체의 필요성을 느낀 고희동은 1918년 스승 안중식의 도움, 그리고 오세창, 강진희, 현채, 김돈희 등 13명이 힘을 모아 '서화협회'를 조직했다. 서화협회는 전통과 근대미술의 조합을 추구하였지만 재정적 어려움은 여전히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타개할 수밖에 없었다. 서화협회는 미술교육은 물론 전통미술품들을 수집해 대중들에게 전시하고, 나혜석 등 재능있는 미술가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도움을 일절 배격하려던 미술가들의 보이콧과 서화협회를 방해하려던 목적으로 총독부가 창립한 조선미술전람회 탓에 서화협회의 활동에도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었다. 결국 서화협회는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을 마지막 활동으로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해방 후 서화협회를 대신할 대한미술협회가 만들어졌고, 전쟁이 끝나고는 한국미술가협회가 독립했으나 1961년 두 협회가 한국미술협회로 합쳐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에서 해방 직후까지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등의 화가들이 근대미술을 완성지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김환기, 남관, 장욱진 등의 화가들을 기점으로 모더니즘적 예술이 큰 힘을 얻으며 비로소 현대미술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층은 회화라는 장르를 넘어서 미술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현대예술을 위한 공간이다. 다양한 설치미술, 조형미술, 팝아트, 디지털아트 등 감각적인 아티스트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구경하실 수 있다. 다양한 형식의 예술품들이 존재하지만 2층의 전시품들은 대부분 리얼리즘과 민중예술이라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3층과 2층은 상설전시라 무료로 전시지만, 1층의 기획전시실은 유료 관람이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서울대공원 안에 있기 때문에 자가 차량 이용 시 상당히 불편할 수 있다. 지하철 4호선 대공원 역에서 과천관까지 직행하는 셔틀버스가 있으니 홈페이지를 통해 시간표를 알아보고 셔틀버스 이용을 권장한다.
과천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과천의 랜드마크이자 대한민국에서 경마장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렛츠런파크'이다. '렛츠런파크' 라는 이름 자체는 생소하지만 과천경마장의 존재는 아주 익숙할 것이다. 원래 과천경마장의 이름은 '서울경마장'으로 지금의 한양대와 뚝섬 사이에 있었다. 서울경마장의 전신은 1924년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가 만든 경성경마장이다. 경성경마장은 해방 후 이름을 서울경마장으로 바꾸어 이어지다가 1984년 지금의 서울숲이 만들어지면서 과천으로 이전했다. 88올림픽 당시 승마경기를 겨냥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민간인들에게 개방된 경마장 시점은 1989년이다.
'경마장'이라고 하면 도박의 한 종류로 퇴폐적이고 불건전한 곳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괜히 과천 경마공원이 이름을 '렛츠런파크'로 바꾼 게 아니다. 물론 경마장 2층에는 경마꾼(?)분들이 포진해있지만 1층은 가족 단위, 연인 단위, 친구 단위로 그저 즐기로 오는 일종의 유원지 혹은 테마파크로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했다. 스포츠경기장이라고 해도 좋다. 그저 구경만 해도 좋지만 경험 삼아 소액으로 베팅을 원한다면 최근에는 '마이카드'라는 어플을 사용하고 있다. 경마장으로 들어가면 1층 홀에 안내데스크에서 친절하게 어플 사용 방법을 알려준다. 게임의 유형이 워낙 많아서 집중해서 설명을 잘 들어야 하고, 설령 잘 못 들으셨어도 다시 물어봐도 안내데스크에서 상당히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물론 마시면서 배우는 술게임처럼 경마 게임은 몇 번 해봐야 감이 잡힌다. 전광판에서 보는 타지역 경마말고 현장의 경마경기는 아주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다. 경주마들의 달리는 말발굽 진동은 괜히 나를 흥분하게 하고 그 속도감은 묵은 스트레스까지 뚫어버린다.
렛츠런파크는 말 그대로 '파크', 즉 유원지다. 단순히 경마장만 있는 게 아니라 승마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있으며 말박물관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송수단의 역사만 따지자면 자동차보다 말이 훨씬 길고 깊다. 숱한 역사창작물에서 영웅 곁엔 늘 명마가 등장하는 것만 봐도 말에 대한 인간의 애정이 얼마나 남다른지 알 수 있다. 항우에겐 오추마가, 관우에겐 적토마가, 알렉산더 대왕에겐 부케팔로스가 있었고 하나같이 이 명마들은 주인의 흥망성쇠를 같이 겪는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6.25전쟁 당시 무거운 군수물자를 숱한 포격을 뚫고 한국군에게 전달해주어 하사로 전역한 군마 레클리스도 있다. 또한 천마도의 천마나, 그리스신화의 페가수스, 혹은 유니콘 등 말을 전설로 만들어 상상의 동물로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에게 말은 먼 동물이 아니었다. 말은 지능 또한 굉장히 높은 편이라고 한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같이 살아가야 할 동물의 존재를 이런 여행과 스포츠를 통해 느낄 수 있다는 체험은 아주 값진 것으로 경마장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위성도시라 함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공간에 대해 특정 기능을 부여해 재창조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공간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쳐왔던 흔적들을 느끼게 된다. 어떤 방향이 우선시되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결국 공간과 인간의 생활은 서로 주고 받을 때 온전해진다. 광명이란 지역이 기형도 시인의 시세계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고, 오리 이원익과 추사 김정희가 머물러 그 공간이 특별해졌지만 그 역도 성립이 된다. 우리 자원을 착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시흥동굴도 어느샌가 우리의 산업화에 이바지하다가 이제는 '광명동굴'이란 이름으로 관광산업으로 활성화되었다. 그 변천과정 역시 곱씹어보면 공간과 인간 사이 교류의 역동성을 실감하게 한다. 특정장소와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또 적합한 곳으로 전통재래시장만한 곳도 없다. 인간은 때때로 공간(세계 혹은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시라는 문학작품이든, 미술 혹은 다양한 현대예술이든, 건축이나 디자인이든. 이 역시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일 것이다. 특정 장소 혹은 공간은 세계와 자연의 구현체이기에 가장 뚜렷하게 그 관계의 교류를 체감할 수 있지만 세계와 자연은 동물이나 식물로도 인간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인간이 세계 앞에 제멋대로 군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수직적 권력관계 따위는 없다. 세계 앞에 인간은 주체적인 동시에 수동적인 존재다. 세계가 인간에게 주는 충격을 인간이 흡수해 그것을 재창조하고 다시금 세계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세계 앞에 겸손해지는 동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세계에 어떤 액션과 리액션을 취해야하는지 조금이나마 감이 오겠지.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시인은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습니다. 기형도 시인 사후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 유고시집이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이죠. <입 속의 검은 잎>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집 중 하나이며 오로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인선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들은 멜랑꼴리아의 미학을 품은 작품들로 사회와 문명과 개인의 검은 고통을 읊조리고 있죠. 읽고 나서 아름답다거나 편해진다는 느낌이 들진 않지만 시인이 바라봤던 세계와 그것이 어떻게 시를 통해 표현되는지 그 방법을 고민해보면서 시를 읽으면 심적으로 무거운 흔들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워 호스>
1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사람과 말의 유대관계를 다룬 따뜻한 전쟁감동 영화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모든 영화감독들 중 가장 영화를 착하게 만드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다소 유치할 순 있어도 참 선하다는 인상 덕에 영화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휴머니즘적 주제뿐 아니라 전쟁씬을 연출하는 감독의 기량도 이미 국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었죠.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대감이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며 동물과 세계와 소통하는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영화가 동화적인 연출로 선보여준답니다. 연말에 가족끼리 보기 딱 좋은 영화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