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셸런버거,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읽고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여전히 도시에 살고 있다. 종종 도시의 삭막함과 복잡함, 높은 집값과 물가, 인위적임과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꿈을 꾼다. 시골은 자연스럽고 도시는 인위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시골의 부족한 의료 인프라, 개인주의를 덜 인정하는 문화와 같은 시골의 단점,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고, 익명성에 기대 비교적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도시의 장점 모두를 덮어버린다.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여러 사례를 들어 자연은 선이고 인공은 악이라는 환경 종말론자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가령, 플라스틱을 발명해 거북 껍데기와 상아를 대체해서 바다거북과 코끼리를 죽음에서 구했으며, 자동차가 말을 대신하면서 뉴욕은 말의 배설물, 질병 창궐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셸런버거는 우리가 환경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실제로는 탄소 배출을 증가시켜 기후 변화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신뢰하는 환경 운동가가 여러 이해관계에 얽혀서 오히려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 책을 읽고 위험하고 ‘인위’적인 원자력 발전에서 벗어나 태양열, 풍력, 바이오매스 같은 ‘자연’에서 얻는 친환경 에너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헤게모니를 지금껏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도까지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지구에 큰 위기가 닥친다’라는 환경 운동가의 주장을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종교적인 신앙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연은 자연스럽고 긍정적이고, 인공은 부자연스럽고 부정적이라는 편견에 얼마나 강력하게 사로잡혀 살아온 건지. 실제로는 인위적인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 덕분에 삶의 질을 유지하는 혜택을 누렸으면서 말이다. 경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일반 항공기보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면서 지구를 위해 채식을 하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다.
셸런버거는 저밀도 고가의 신재생 에너지는 결코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며, 고밀도 저가의 원자력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신재생 에너지는 친환경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며, 안전한 원자력이 자연보호의 희망이라고까지 말한다. 후쿠시마, 체르노빌의 최악의 원전 사고는 여전히 회자하고 있고, 각국 리더들은 탈원전 시대를 선언하는 마당에 원자력을 적극 지지하다니 언어도단(言語道斷) 같다. 원자력의 안전성 문제를 논하는 것과는 별개로, 넓은 부지에 태양광을 설치하려면 그만큼 나무를 베어야 하고, 풍력 발전 터빈에 수많은 철새와 곤충이 죽는다는 사실은 감춰져 있다는 의견은 설득력 있다.
셸런버거의 시종일관 경제 성장이야말로 환경 보호이며, 개발과 보호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개발 국가의 경우, 제조업이 발달해 축적한 부(富)로 수력 발전과 원자력 발전을 한다면, 더는 공해를 야기하는 나무나 석탄 연료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농업 기술이 발전해 단위 면적당 식량 재배량을 늘리면 화전(火田)으로 숲을 파괴하지 않고, 기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초기에는 화력 발전이 불가피하지만, 부유해지면 아이를 덜 낳고, 그러면 인구 성장이 멈추고, 탄소 배출량은 적어질 것이다. 사실 나는 이전부터 선진국이 지구 온난화를 이유로 개발도상국에 탄소 배출을 감축하라고 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자신들은 줄곧 걸어온 산업화의 길을 환경주의를 앞세워 개발도상국에 개발 속도를 늦추라거나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라며 각종 제재를 가하는 형국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책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긴 상식을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편견을 깨고 의심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몇백 년 만의 홍수, 가뭄, 산불, 기록적인 더위, 기록적인 추위라는 뉴스를 볼 때면 당연하게 ‘지구가 아픈가 봐. 환경을 파괴하는 우리 인간이 문제야. 과연 우리 후손은 괜찮을까?’라는 기후 종말론과 연결 짓곤 한다. 몇백 년 만에 벌어진 일이라면, 산업화 이전인 몇백 년 전에도 비슷한 자연재해가 벌어졌다는 말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일은 꼭 해결해야 할 당면한 과제지만, 언젠가부터 모든 이상 기후를 맥락 없이 지구 온난화 탓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이 둘 사이에 빠진 맥락은 무엇인지, 실제로 인과관계는 성립하는지, 다른 환경 파괴의 주범은 없는지 되짚어보며 환경 휴머니즘의 길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