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과 허빙자오
센강의 수질 오염부터 테러 등의 치안 문제, 파리는 원래도 관광객이 많은 도시라 올림픽 관람객까지 합쳐질 도시 과포화, 올림픽 개최로 몇 달 새 급격히 상승한 교통비와 물가 등으로 올림픽 개최를 반대한 파리 시민들, 201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제기된 근본적인 올림픽 개최 회의론까지...... 여러 우려 속에 치러진 파리 올림픽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타당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센강이 가로지르고 에펠탑이 우뚝 솟은 낭만의 도시 파리를 캔버스 삼아 최초로 야외에서 펼쳐진 개막식을 시작으로, 그랑 팔레, 베르사유 궁전, 콩코도르 광장, 앵발리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등 파리의 고풍스러운 역사적인 장소와 건축물을 배경으로 펼쳐진 파리 올림픽은 단연 아름답고 예술적인 세계인의 축제였다.
야구, 축구, 농구, 골프 등등의 프로 경기는 물론이고 올림픽과 쌍벽을 이루는 국제대회, 월드컵에도 별반 관심이 없지만,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하계, 동계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즐겨보는 편이다. 우선, 아시안게임은 미국과 유럽 등이 강세인 육상과 수영 등의 종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아시아 선수들을 발견하는 기쁨, 동아시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평소에 접할 일이 없는 수많은 아시아 국적의 선수들을 (비록 화면상이지만)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서 좋다.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간절함이 빚어내는 예측불가한 인생 드라마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잊고 있던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올림픽 때마다 우리나라에서 비인기종목인 경기를 한두 개씩 챙겨보며 새로운 경기와 규칙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모든 경기의 목적은 우승, 참가한 선수들의 바람은 1등이고, 단연 승리를 쟁취해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은 언제나 가장 눈에 띄고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지고도 상대 선수를 축하하고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선수들, 큰 실수를 해 메달권에서 멀어졌는데도 완벽한 경기를 펼친 경쟁 선수에게 고생했다고 안아주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문득, 운동선수는 세상에서 지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운동선수는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패배를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운동 경기는 승패가 갈리고 순위가 매겨진다. 만일, 패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경기장에 결코 발을 디딜 순 없는 일이다. 운동선수를 직업으로 선택할 자격에 미달하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의 우아한 패배자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수용하기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성큼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항상 승리를 목표로 하지만 언제든 질 준비도 잘 돼 있었다. 숙련된 선수들은 이를 잘 알기에 올림픽이라는 꿈의 무대에서조차 이기든 지든 서로 존중하고 격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제든 잘 질 준비가 돼 있는 사람, 실패에 좀 더 관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이번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여자 배드민턴 단식 종목, 허빙자오와 캐롤리나 마린이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 준결승전에서 세계랭킹 3위 스페인 캐롤리나 마린과 세계랭킹 7위 중국의 허빙자오가 대결을 했다. 1세트(21-14)에 이어 2세트도 10대 5로 이기고 있던 마린은 허빙자오의 드라이브를 점프해 받아치고 착지하면서 오른쪽 무릎에 강력한 통증을 호소했다. 쓰러져서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린은 무릎에 압박 밴드를 착용하고 경기를 이어갔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까스로 셔틀콕을 쳐내던 마린은 연속해서 점수를 내주다 10대 8 상황에서 결국, 코트 뒤로 물러나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서럽게 흐느껴 운다. 결승전을 코앞에 두고 더는 경기를 할 수 없다고 직감했는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보는 나도 안타까운 눈물이 절로 났다. 한참을 흐느끼던 마린은 일어나서 관중에게 양해를 구하고, 휠체어 대신 절뚝거리는 다리로 걸어서 퇴장하며, 세계적인 선수답게 경기를 원만히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웬걸, 국내외 할 것 없이 배드민턴 팬들은 마린을 동정하기는커녕 국내 팬은 업보, 해외 팬은 karma(카르마)라며 반응이 싸늘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라며, 아직 세상은 살만하고 정의는 살아있다는 놀라운 반응이었다. 마린은 배드민턴 팬 사이에서 비매너, 무개념, 개차반, 이기주의, 땡깡녀로 유명한 듯했다. 평소 마린은 복장을 정비한다는 등의 이유로 고의로 경기 시간을 지연시켜 상대 선수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서비스 셔틀콕을 넘겨줄 때 일부러 구석 등으로 던져 상대 선수의 기운을 빼거나, 득점 시 필요 이상으로 큰소리를 내는 등의 행동으로 빈축을 산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2016 리우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리쉐루이(중국)가 경기 도중 무릎 부상으로 제대로 된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린은 득점할 때마다 고성을 지르며 환호한 전적이 있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조롱까지 듣는 지경이었다.
반면, 허빙자오는 마린이 처음 쓰러졌을 때도 곁에 다가와 염려하는 모습, 마린의 기권패로 결승전 진출을 확정했을 때도 기뻐하기보다는 연신 안타까운 표정이 카메라에 담겼다. 준결승전이 끝나고 인터뷰를 할 때도 울먹이며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너무 안타깝다. 내가 쭉 뒤지고 있었지만 계속 (역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며 “상대 선수는 오늘 좋은 컨디션을 보였고, 승리에 대한 열망이 느껴졌다. 이런 부분을 내가 배워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운도 실력이라고, 마린 선수의 부상이 허빙자오 선수의 탓도 아니고, 마린의 부상은 안타깝지만 허빙자오가 지금껏 열심히 노력했기에 주어진 기회인데도, 허빙자오 선수의 따뜻한 마음씨, 상대 선수를 향한 존중과 배려, 경기와 승부보다 우선돼야 할 인간으로서 도리를 실천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결승전에서 안세영 선수에게 패해 은메달을 획득한 허빙자오는 시상식에 스페인 국기 모양의 작은 배지를 한쪽 손에 들고 입장해 기념사진 촬영 내내 이 배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또한 전날 자신과 준결승을 치르다 부상으로 기권한 카롤리나 마린을 위한 배려이자 존중의 표시였다. 허빙자오는 시상식 후 기자회견에서 “준결승 상대인 마린이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슬펐다. (그를 위해) 시상대에서 스페인 배지를 달았다”며 “마린이 시상식에 선 내 모습을 보길 바라고, 그가 곧 회복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동료를 향한 따뜻한 마음과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마린과 허빙자오의 상반된 대처, 팬들의 상이한 반응에서 선수 개인으로서는 승패가 가장 중요할지 몰라도, 다시금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기 규칙에 따라 정당하게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상대 선수의 부상에 따른 기권승으로 꿈의 무대에 선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허빙자오 선수의 인간다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외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수나 경기를 꼽자면,
비록 목표한 5관왕에는 실패하고, 8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최전성기만큼의 기량은 아니었지만, 체조 선수로는 치명적인 트위스티스(공중 동작 시 부상 두려움에 휩싸여 신체 통체력을 잃는 상태)를 극복하고 무려 금메달 3개를 차지하며 여전한 전성기를 증명한 시몬 바일스 선수.
유도 혼성 단체전에서 두 번이나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시키는 자기보다 높은 체급의 선수와 경기를 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유도는 힘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니라 체력과 기술, 순발력과 민첩성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보여준 안바울 선수.
다이빙, 승마 등에서 큰 실수로 경기 초반부터 메달권과는 관련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경기 끝까지 그동안 준비한 기량을 한껏 선보인 여러 선수들.
시원한 연속 회전공격 발차기로 태권도의 재미를 일깨우고, ‘상대가 기권하기 전까지는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배웠다며 종이 한 장 차이이기 쉬운 어쭙잖은 동정과 연민, 진정한 존중의 차이를 깨닫게 한 태권도의 박태준 선수.
2018년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 첫 경기인 32강전에서 중국의 천위페이에게 패해 단 한 경기 만에 탈락, 2020 도쿄 올림픽 8강전에서 천위페이에게 패배해 또 탈락, 심기일전 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국제대회에서 천위페이를 비롯한 탑 랭킹 선수들을 이기는 횟수가 점점 늘더니,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단체전, 여자 단식 결승에서 대결한 천위페이와 접전 끝에 두 번 다 승리, 명실상부 세계랭킹 1위로서 세계적인 배드민턴 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받으며 마침내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우승하며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건 안세영 선수.
손에 땀을 쥐고 잠을 설치던 울고 웃으며 즐거웠던 17일간의 파리 올림픽도 이제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