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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Feb 07. 2024

도레미의 하늘색 원피스

처음 써 본 단편 동화(6,000자)

레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평범한 축에도 못 끼는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레미를 만나고 내 인생은 180도로 완전히 바뀌었다.


무슨 이유인지 여자 아이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분홍이와 노랑이, 하양이는 벌써 떠났는데 나는 어느덧 3개월째 매장에 콕 박혀 있었다.

처음에 왔을 때는 가장 눈에 잘 띄는 매장 입구 쇼윈도에 진열돼 있었다.

그러다가 옷걸이 앞줄, 중간, 뒷줄을 거쳐서 점점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이동했다.

어느 순간, 어둡고 차가운 창고로 영영 버려지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때, 기적처럼 레미가 나를 찾아왔다.

“엄마, 나 이 옷 살래요.”

“높은음자리가 그려진 원피스네? 레미는 옷 살 때도 음악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레미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분홍색이나 노란색이 더 낫지 않을까?”

“싫어요. 난 이거 사고 싶어요, 하늘색 옷. 오늘은 생일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신 거 맞죠? 분홍색 말고 하늘색 사주세요.”

레미의 고집 덕분에 나도 드디어 옷가게를 벗어나 레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에 가면 레미가 나를 바로 입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서 실망했다.

“레미야, 새 옷은 빨래바구니에 넣어 두렴.”

“왜요? 바로 입으면 안 돼요?”

“새 옷에는 공장에서 만들 때 사용한 화학물질이 잔뜩 묻어 있잖니. 지난번에 새로 산 티셔츠를 안 빨고 그냥 입었다가 두드러기가 나서 한동안 고생했던 거 기억하지?”

“치…… 새 옷 입고 싶은데……”

결국 나는 빨래바구니에서 다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빨래바구니에는 레미의 핑크 레이스 드레스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자신감이 대단히 넘쳐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예쁘고 특별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어머, 넌 누구니?

“저는 레미의 새 원피스예요.”

“말도 안 돼! 너처럼 평범한 게 레미의 새 원피스라고? 그리고 여자애들은 하늘색 안 좋아해. 나처럼 화사하고 눈에 띄는 분홍색을 좋아하지. 아마 넌 레미에게 금세 싫증나서 잊힐 걸?”

핑크 레이스 드레스의 말이 맞다. 여자애들은 무슨 이유인지 하늘색보다 분홍색을 좋아한다. 매장에서도 분홍이, 노랑이, 하양이는 먼저 선택받아서 떠났다. 옷가게에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은 건 사실이다. 레미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은 어두컴컴한 창고에 처박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핑크 레이스 드레스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어두운 내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잘조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레미는 이번 연주회에도 분명히 나를 입고 갈 거야. 작년에 이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레미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너는 모를 거야. 나를 입고 관객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행복해하던 레미의 모습은 잊을 수 없어.”

“피아노 연주회요?”

질문을 하면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잘난 척하며 그래도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었다.

“레미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서 매년 연말에 피아노 연주회를 열거든. 그동안 연습한 걸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 앞에서 선보이는 거지. 올해도 레미와 같이 무대의 주인공이 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는 걸.”

“저도 그 연주회에 갈 수 있을까요?”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아이고, 꿈도 커라. 얘,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연주회에는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만 갈 수 있어. 나처럼 예쁘고 화려만 옷만이 갈 수 있지. 너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옷은 넘볼 수 없는 곳이라고. 알겠니?”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과 평범한 나는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전부 사라졌다. 나는 말없이 풀이 잔뜩 죽어버렸다.


한동안 나는 연주회에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세탁기에서 깨끗해지고 햇볕에 잘 마른 뒤에는 레미가 쉴 새 없이 나를 입어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레미와 같이 학교에 갔다. 함께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고 놀이 활동을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친구 집에도 놀러 갔다. 레미와 나는 같이 길을 걷고 운동장을 달리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한번은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내 얼굴에 범벅이 된 적도 있다. 하지만 세탁기에서 깨끗해지고 햇볕에 잘 마르면 다시 레미가 나를 입을 거라 염려는 안 되었다. 레미는 심지어 잠옷 대신 나를 입고 잠들기도 했다. 레미는 나를 좋아했고,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나는 레미와 피아노 학원도 함께 갔다. 선생님은 작은 수첩에 아이들이 연습할 횟수를 동그라미로 그려주었다. 연습을 한 번 마치면 동그라미를 하나씩 색칠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동그라미를 다 칠하면 ‘드디어 해방이다!’ 싶은 홀가분한 얼굴로 학원을 박차고 나갔다. 어떤 아이들은 도둑고양이처럼 선생님 눈치를 봐 가며 한 번 연습하고 동그라미를 두 개씩 색칠하기도 했다. 그럼 연습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연습을 너무 빨리 끝마쳐서 선생님이 거짓말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이 한곳에 앉아서 반복 연습을 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지 이해했다. 그래서 한두 번은 모른 채 눈감고 넘어가주고는 했다.

그런데 레미는 피아노 학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좀 이상했다. 레미는 수첩의 동그라미를 다 칠해도 연습실을 나서지 않았다. 쳤던 곡을 치고 또 쳤다. 같은 곡을 반복해서 연주하는데 지루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피아노를 치는 레미의 표정은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도도 솔솔 라라 솔솔 파파 미미 레미레미레도’

‘솔솔 파파 미미 레레 솔솔 파파 미미 레레’

‘도도 솔솔 라라 솔솔 파파 미미 레미레미레도’


레미에게 피아노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었다. 레미에게 피아노는 재밌는 놀이였다. 컴퓨터 게임이나 유튜브 영상처럼 한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활동이었다. 그래서 레미와 나는 피아노 학원이 문 닫을 시간이 되었을 때 제일 마지막으로 나오고는 했다. 우리가 학원 문을 나서면 그제야 학원의 불이 꺼졌다.

옷가게에서 나를 사갈 손님을 기다릴 때는 지루하고 불안했다. 그런데 레미가 피아노 연습을 마치기를 기다릴 때는 전혀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레미의 연주에 집중해서 가만히 귀기울이다 보면 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도 이 시간이 레미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다. 레미의 연주에는 뭔가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미의 피아노 소리에 행복해질수록 레미의 연주회에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슬퍼졌다.




시간이 흘러서 결국 연주회날이 다가왔다. 콧대 높은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해 보였다.

“드디어 연주회구나.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지 이제는 귀찮을 지경이야. 하늘이, 너는 평생 누릴 수 없는 영광이지.”

하늘이는 핑크 레이스 드레스가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그런데 이때 레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핑크 레이스 드레스 등 뒤에 지퍼가 안 잠겨요.”

“어머나, 이를 어쩌니. 드레스를 자주는 안 입으니까 여러 번 입으려고 일부러 약간 넉넉한 크기로 샀던 건데…… 레미 네가 그새 많이 자란 모양이야.”

엄마가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옷가게에 들를까, 레미야?”

“그러기엔 연주회까지 시간이 촉박할 거 같아요.”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못 입게 된 레미는 울상이었다.

“참! 올봄에 새로 산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진 하늘색 원피스는 어딨어요?”

“어제 빨아서 네 서랍장에 넣어뒀지. 드레스 대신 그 옷은 너무 평범하지 않겠니?”

“드레스는 아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잖아요. 평소에도 이 옷 입고 연습을 많이 했어요. 오늘 이 옷을 입으면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길 것만 같아요. 연주회에 어울리는 높은음자리표가 프린트된 옷이기도 하고요.”

이런 사정으로 갑자기 나는 핑크 레이스 드레스 대신 레미의 연주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핑크 레이스 드레스에게는 미안했지만 속으로는 기뻐서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레미와 함께 연주회 대기실에 들어서자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드레스들 사이에서 평범한 나는 초라해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레미의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레미야, 너는 왜 드레스 안 입었어?”

친구의 물음은 초라한 나를 꼭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평범한 원피스를 입고 연주회에 오게 된 레미에게 미안해졌다.

이때 레미의 솔직하고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대신 이 하늘색 원피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야.”

“그래? 아마 나라면 드레스 없이는 연주회에 오지 못했을 거야. 그런 평범한 옷을 입고는 연주회에서 더욱 숨어버리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레미 너는 참 대단하다.”

부끄러운 듯 레미는 말을 했다.

“대단하긴. 나도 처음에는 배가 아파서 연주회에 못 온다고 핑계를 댈까 생각했어. 그런데 그러면 일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한 게 아깝잖아. 연주에서 중요한 건 옷이 아니니까.”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마침 레미의 이름이 불렸다.

“도레미 학생, 준비하세요.”

이렇게 나는 처음으로 레미와 함께 무대에 서게 되었다.


역시나, 다른 아이들과 달리 평범한 원피스를 입은 레미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웅성웅성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레미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다. 그리고 레미가 피아노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레미의 연주가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레미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줄 차례였다.

‘레미야, 넌 잘 할 수 있어.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니까. 사람들에게 네 아름다운 연주를 마음껏 들려주렴.’


‘도도 솔솔 라라 솔솔 파파 미미 레미레미레도’
 
레미가 연주를 시작하자 객석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레미의 연주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솔솔 파파 미미 레레 솔솔 파파 미미 레레’

‘도도 솔솔 라라 솔솔 파파 미미 레미레미레도’


레미의 성격을 꼭 닮은 맑고 투명한 진실된 연주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레미가 평범한 원피스를 입었는지,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는지도 더는 하나도 안 중요했다. 레미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만이 객석을 파고들어 사람들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레미도, 사람들도 모두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객석에서는 큰 박수 소리와 앙코르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대신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진 평범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레미의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나만 레미의 피아노 연주가 특별하다고 느낀 게 아니었다. 마침 레미의 연주를 인상 깊게 본 지역 신문 기자는 레미의 연주를 기사로 다루었다. 제목은 ‘하늘색 드레스 소녀 레미,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다’였다. 이렇게 나는 레미와 같이 뉴스에 사진으로도 실리게 되었다. 레미는 어쩌다가 드레스가 아닌 평범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연주를 하게 되었는지도 인터뷰했다.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인 것 같다. 이 인터뷰를 본 아이들은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진 하늘색 원피스를 앞다퉈 사 입었다. 이 원피스를 입으면 레미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유행은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퍼져갔다. 다음해에 여자 아이들은 전부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평범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연주회에 참여했다. 옷가게에서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진 하늘색 원피스는 늘 가장 먼저 떨어졌다. 이제 나는 분홍이도, 노랑이, 하양이도, 핑크 레이스 드레스도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레미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레미의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




시간이 더 흘러서 레미는 나를 더는 입지 않는다. 핑크 레이스 드레스처럼 이제 나를 입기에 레미는 훌쩍 커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더는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다. 내 마음에는 레미와 함께한 행복한 추억이 가득 남아있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핑크 레이스 드레스는 여전히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데, 요새는 그 증상이 더 심해졌다. 레미의 동생 레라가 조만간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입을 만큼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핑크 레이스 드레스에게 주눅이 들지도 않는다. 레라가 핑크 레이스 드레스와 잘 어울리기를, 그래서 핑크 레이스 드레스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스토리 기획 과정>


어렸을 때 다른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동네 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리는 연말 연주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한껏 주목을 받으며 피아노 연주를 뽐내는 친구가 부러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만일 어린 시절 나에게도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생겼다면 어떤 옷을 입고 갔을까?'에서 시작한 생각을 열등감에 익숙한 하늘색 원피스, 잘난 체를 좋아하는 핑크 드레스, 어리지만 내면이 성숙한 도레미의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계속 실제 경험에 기반한 에세이를 쓰다 보니 이야기 구성에서 좀 더 자유도가 높은 스토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해 스토리 쓰는 법을 배우고자 어린이 책 쓰는 법에 관한 수업을 들었고, 이 글은 의인화된 6,000자 단편 동화 쓰기 기말 과제로 제출하고 평가받은 창작물입니다. 제가 과연 순 창작 스토리를 쓸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두고 시도해 본 글이라 따로 자료 조사를 하지는 않아서 구체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스토리를 만드는 재주가 아예 없지는 않구나 생각하게 된 작업물입니다.


저 또한 부담 없이 작성한 길지 않은 글이니 보시는 분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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