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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의 윤슬 Jul 27. 2021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의 완곡어법

프리랜서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연예인도 아니고 기자회견을 한 것도 아니고 선언이라는 단어가 좀 그렇기도 하고,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신경쓸 사람이 어디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또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정말 혹-시라도 혹-여라도 사람이 필요할 때 나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래도 내가 아는 혹은 나를 아는 사람이 모여있는 인스타그램에 꽤 긴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정말 프리랜서로 잘 나가고 말겠어!"같은 거창한 생각으로 문을 박차고 나온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긴커녕 제대로 된 플랜비조차 만들어두지 않았고, 하다못해 몇 주를 버틸 일감을 물고 나온 것도 아닌데다, 마이너스통장 개설이 어렵다는 게 의미하는 바를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고 무한한 현타가 서서히 오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땐 도무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나는 시들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나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박희아 인터뷰집, 카시오페아

어쩌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자잘한 감정의 기복들일뿐이었을텐데도 어느샌가 그 속에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고. (업무의 연장인) 단체점심식사 혹은 그걸 피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시간을 포함해 장장 9시간동안, 그저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일이 없어도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아마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혹은 예전처럼 통역 비중이 많은 곳이었다면, 매 번 이 회의실, 저 호텔, 저 지역, 저 국가를 번갈아가며 지루할 틈이 없었을테니 좀 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같은 사람, 같은 시간, 같은 일을 견디는 성실한 타입이 되지 못하고, 늘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사람들과의 기분좋은 정신없음을 즐겨왔던 사람이니까요.  


뭐가 되었건 예전이었다면 "이런 것쯤이야"하고 넘겨버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성에 맞건 안 맞건 일단 자리만 지키면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데 진짜, 생계는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하필 그때의 나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고 그래서 그 모든게 너무 크게 다가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빙빙 두르긴 했지만 결국 흔하디 흔한 번아웃이 아니었을까.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 박희아 인터뷰집, 배우 안희연 편, 카시오페아 출판사



서론이 길었던 이유는 지금의 나, 그리고 나중의 나에게 그 때의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벌써부터 "어쩌자고" "대책없이" 등등의 말들이 머릿속에 웅웅대는 나머지 거의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롭게 부딪혀야 한다는 것도, 이미 엄청난 선배님들께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것도, 생각보다도 일이 너무 없으면 어쩌지...싶은 것도. 문득문득 어쩌자고 뒤늦게야 불안하기도 하지만 일단 도전에 방점을 찍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아 도저히 안 되겠다며 다시 주섬주섬 취업을 할 수도 있을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생계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진작할 걸 그랬다며, 마침내 물 만난 물고기마냥 즐길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찌되었건 가던 길만 가다보면 살던대로만 살게 될 뿐이니, 너무 거창하게 혹은 너무 멀리 앞당겨 생각하지 않고 이 참에 한 숨 고르면서 멘탈도, 녹슨 실력도 재정비한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잘 풀리면 잘 풀려서 좋고, 안 풀리면 직장생활에 새삼 감사하게 될테니 이러나 저러나 좋다!며 호기롭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좀 적극적으로, 또 주체적으로, 마침내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보는 경험은 꽤나 의미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주제들, 새로운 세팅들, 새로운 이야기들. 아낌없이 경험해볼 생각입니다. 다 잘 된다 보고. 대책없이 낙관적인 습관을 들이는 기회라 생각하기로.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한수희, 어라운드


연막탄은 잔뜩 쳤지만, 올해가 끝날 땐 이 글을 다시 보며 이렇게 두려울 때도 있었다며 새삼 놀랐으면 좋겠습니다. '그 틀 안에 있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고, 정말 그 틀 너머에도 세상이 존재하더라'며, 그저 지레 겁먹었었던 거라며, 이렇게 잘 될 줄 몰랐다며 웃으며 마무리하는 한 해가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As my favorite quotes go,

Better oops than what if, and you really never know.


<나를 움직인 문장들>, 오하림, 자그마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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