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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Dec 23. 2019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④

드디어 셋째 날, 오후가 되어 기숙사 사감 할머니가 오셨다.

정갈하게 빗어 넘겨 뒤로 묶은 백발에 머리색과 맞춘 듯 밝은 회색의 판초가 보였다. 얼른 달려가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볼에 닿는 할머니의 귓불은 묘하게 차가웠고 내 코가 닿은 판초에서는 늘 그렇듯 섬유에 겹겹이 밴 담배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열쇠 꾸러미로 금고를 열고 내 돈봉투를 꺼내 주셨다. 돈 봉투에서 한 달치 용돈을 꺼냈다. 알량한 지폐 한 장에 마음이 다 든든했다. 봉투 뒷면에는 입금과 출금 내역을 수기로 기록해놓았다. 마지막 줄의 잔액 아래에 날짜와 오늘 꺼낸 금액을 적고 밑줄을 그었다. 그런 다음 남은 잔액을 적고, 봉투 안의 돈을 꺼내 세보았다. 액수가 잘 맞았다. 다시 봉투 안에 나머지 돈을 넣는데 할머니가 불현듯 생각난 듯 물었다.


"스위티, 그런데 너 밥은 어떻게 해결했니?"

나는 간식 같은 게 있어서 괜찮았다고 했다. 돋보기안경 뒤 커다란 할머니 눈이 경악으로 더 커졌다. 

"이제 돈이 들어왔으니 사 먹으면 되고 내일부터 식당에서 밥을 주니 괜찮아요." 

여전히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는 할머니한테 씩 웃어 보였다.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프리칸스어로 크게 탄식을 하셨는데, 대략 신의 가호를 구하는 말 같았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나를 한번 더 꼭 끌어안았다.


사감 할머니와 굶지 않고 밥을 잘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용돈을 두 손에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고대하던 만찬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시간은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일렀다. 하지만 더 이상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 샤워를 했지만, 다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엄마한테 물려받은 향수를 꺼냈다. 엄마가 오래전에 선물 받았다는 샤넬 넘버 파이브. 향수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밝고 산뜻한 친구들의 향수와 샤넬은 확연히 달랐다. 더 밀도 있고 짙은 향을 풍겼다. 엄마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받은 거라 향도 다 변하고 병 바닥에 조금 남은 게 전부였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 향수를 바르는 건 나에겐 어른의 공기를 입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미리 골라둔 옷을 꺼내 입었다. 가진 옷 중에 가장 좋은 검은 바지와 점잖은 재킷을 걸치고 스카프를 둘렀다. 안 하던 화장도 했다. 비비크림을 공들여 펴 바르고 아이라이너에 마스카라도 발랐다. 마지막으로 가죽 구두를 꺼내 신고 기숙사 계단을 내려갔다. 해묵은 샤넬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발 밑의 구두굽이 계단참에 부딪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 큰 소리를 내며 걸으면 안 됐다. 계단을 다 내려와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기숙사 복도를 살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둘이서 캠퍼스 밖에 나갔다가 징계를 받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여학생은 세 명 이상 무리를 지어야만 시내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둘이 나갔다가 노숙자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것이다. 두 친구의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오시고 퇴학 얘기가 오 갈 정도로 학교는 학생이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평소에는 사감 할머니께서 기숙사 입구에 자리한 사무실을 지키고 계신다. 아직 개학 전이라 사감 할머니는 기숙사 옆에 붙은 댁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복도에 숨어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지나 후문으로 나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학교 담장 밖으로 나왔지만 누가 담장 너머로 나를 발견하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근처에 누가 있지는 않나, 눈을 열심히 데굴데굴 굴려 사방을 살피며 캠퍼스를 무사히 벗어났다.


이제 길을 건너면 마트가 나오고, 마트를 지나 두 블록만 더 가면 레스토랑이 있는 거리가 나올 것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간 모양인지, 하늘이 시시각각 어두워지고 있었다. 캠퍼스를 무사히 탈출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길을 건너기 위해 차가 오는지 살폈다. 그때 길 맞은편에 노숙자가 눈에 들어왔다. 길 위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가로등이 빠르게 깜빡이더니 불이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노숙자는 어슬렁거리며 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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