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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Dec 16. 2019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③

이튿날에는 시리얼 바를 세 개나 먹을 수 있었다. 시리얼 바를 하나 해치우고 나면 다음 끼니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때는 스마트 폰은커녕, 손톱만 한 흑백 화면이 달린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노트북은 고장 났고, 인터넷은 쓸 수 없었다.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게 없었다. 졸업 과제를 붙들고 있으면 그래도 시간이 좀 잘 흘렀다. 그러나 몇 시간 집중하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손발이 차갑게 식고 하얗게 질렸다. 남아공은 한국처럼 온돌 같은 난방 시스템이 없어서 겨울 낮에는 실외보다 실내가 더 추울 때도 있었다. 할만한 일은 다 해봤는데 아직 창 밖의 해는 기운이 넘쳤다. 


침대에 누워 그램스타운의 레스토랑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탈리아 음식점, 프랑스 음식점, 화덕피자 전문점, 스테이크 하우스, 브런치 카페. 그램스타운은 작은 시골 동네여서 고급 음식점은 손에 꼽았다. 차가운 손을 주무르고 비비며 레스토랑의 메뉴들을 되짚어 봤다. 예전에 친구 부모님들이 데리고 가 주셨던 곳들이라 몇몇 메뉴를 알고 있었다. 버섯 크림 리조토, 생선살 스테이크, 루꼴라와 아보카도가 올라간 피자... 셋째 날 먹을 만찬은 더 정성 들여 골라야 했다.


승리는 이탈리아 음식점의 차지였다. 로제 와인 때문이었다.

당시 만 18살이어서 남아공에서는 합법적으로 술을 살 수 있었다. 혼자 유학을 하는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3년 동안 술은 마실 기회가 생겨도 철저히 멀리했다. 그러니 로제 와인을 마시기로 한 것은 꽤 큰 결심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혼자 비싼 밥을 사 먹어본 적이 없었다. 밥은 항상 집이나 학교에서 주거나 어른들이 사주시는 것이었다. 친구들과도 소소하게 분식류를 사 먹는 게 전부였다. 스스로에게 만찬을 대접하는 것은 무척 어른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이 '어른스러운 의식'을 완성하는 것은 한 잔의 와인이었다.

  

조명이 은은한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 따끈한 식사에 로제 와인 한 잔을 기울이는 상상을 하니 길고 허기진 하루도 견딜만했다.


그리고 대망의 셋째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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