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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Jan 27. 2020

남아공 유학 | 08. 슬럼프와 마중물

남아공에 간 지 삼 년 차, 영어가 도무지 늘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했다. 귀는 뜨였지만, 글쓰기는 일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친구가 귀 기울여 유심히 듣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책은 얼마나 읽어?"


충격이었다. 내가 영어로 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나눠주는 책이나 자료 외에는 글을 거의 읽지 않고 있었다.


마침 방학이 다가왔다. 방학 동안 독서를 해서 실력을 키워보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300페이지짜리 고전소설들이었다. 방학 내내 책 앞부분을 펼쳤다 덮었다만 반복했다. 너무 어려운 책을 고른 탓이었다. 우리 말로도 읽어본 적 없는 책이 영문으로 읽힐 리가 없었다. 결국 별 수확 없이 한 달이 넘는 기간이 흘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영어 선생님을 찾아갔다. 영어실력은 늘지 않고 책은 도무지 읽히질 않는다, 고민을 털어놨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도서관에 가면 『회색 갈매기』라는 책이 있어. 그 책을 꺼내서 끝까지 한번 읽어봐. 길지 않은 책이야."


회색갈매기는 30페이지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책이었다. 그림이 많고 글은 한 페이지에 두 세 문장이 다였다. 

처음엔 실망했다.

'날 더러 이걸 읽으라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해보니 녹록지 않았다. 책을 끝까지 정독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게 진짜 내 실력이구나.'

처참한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실망이 가시고 성취감이 샘솟았다. 아무리 짧아도 책 한 권은 책 한 권이었다. 왜 선생님께서 단편소설을 권해주셨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한국에서 읽어서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책을 고르기로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빌렸다. 방과 후에 혼자 기숙사 방에 앉아 책을 펼쳤다. 80쪽 까지 읽기 전에는 엉덩이를 떼지 말자, 다짐했다. 그런데 이십 분쯤 지나자 벌써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온갖 다른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다. 자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이고 책을 읽는데 집중했다. 책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눈으로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며 읽었다. 그렇게 첫날 80쪽까지 완주에 성공했다.


다음 날은 더 긴 시간 집중해서 앉아있을 수 있었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리는 일도 이제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연금술사를 끝까지 읽는 데 성공했다. 기진맥진 한 채로 손에 든 책의 두께와 무게를 느껴보았다. 이제 어떤 책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뒤로 영어실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더 자신감에 넘쳤고 글쓰기 실력도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방과 후에 책을 읽는 것이 취미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니면서 비슷한 일을 다시 겪었다. 이번엔 국문으로 된 글을 읽는 게 무척 힘들었다.

또 한 번 충격이었다. 모국어가 녹슬었다는 충격에 영어도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겹쳤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해준 말이 큰 도움이 됐다.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들고 첫 페이지만 읽어봐. 그리고 그 이상 읽고 싶지 않으면 도로 집어넣고 다음 책으로 옮겨 가는 거야."


그 길로 서점으로 향했다. 책을 한 권 집어들어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냥 이 책을 읽을까 하는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언니 말을 믿고 몇 권을 더 열어보기로 했다. 두 번째 책은 시작부터 지루했다. 빠르게 덮어버리고 세 번째 책을 집어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술술 읽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열 장이 넘어가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책을 사들고 집에와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그 책을 시작으로 다시 독서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나는 출구가 없는 엉뚱한 벽에 몸통 박치기를 거듭하는 꼴이었다. 너무 어렵고 지루한 과제를 고른건 스스로의 한계와 흥미를 알지 못한 탓이었다. 그랬던 내가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건 모두 마중물을 부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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