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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Oct 24. 2019

00. 남아공으로 간 (무식해서) 용감한 여고생

남아공 고교 유학기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네가?’, ‘지금?’

고등학생이 하라는 입시는 안 하고,
그것도 여자 혼자,
그것도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남아공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게 벌써 십 년 전 일이 되었어요.
수년간 용기를 그러모은 끝에 비로소 그때의 기억을 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기숙사 앞 전경. 잔디밭 위로 벽돌길이 나있고 분수대와 교회건물이 보인다.





 제가 처음 유학을 결정했을 때 주변의 반응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네가?’, ‘지금?’


 고등학생이 하라는 입시는 안 하고, 그것도 여자 혼자, 그것도 아프리카를 가겠다고 했으니, 제가 생각해도 황당하게 들렸을 법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유학을 택한 건 원대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고, 단지 제가 교만한 철부지였던 탓이 큽니다. 그런데 운이 좋았습니다. 남아공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아프리카 땅에서 여고생 혼자 무사히 졸업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거센 물살 위로 디딤돌을 놓아준 사람들 덕분입니다.


 저는 그램스타운(Grahamstown)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기숙사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소똥이 떨어져 있고 차로 30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여기서 매년 국제예술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세계 곳곳에서 극단과 음악가,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저는 그램스타운 얘기를 듣자마자 반하고 말았어요. 그 동네에 고등학교가 딱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한곳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기숙사는 총 세 채였는데 해리포터에서 처럼 ‘메리먼’, ‘크루’, ‘에스핀’이라는 기숙사마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남아공뿐만 아니라 잠비아,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백인이 절반보다 조금 많고 나머지 절반은 흑인이었습니다. 동양인과 인도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한국인은 그 동네에서 제가 유일했어요. 남아공의 공식 언어는 자그마치 11개나 되지만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모두가 영어를 썼습니다. 살려면 영어를 반드시 써야 했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영어에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 년에 방학이 총 세 번이었는데, 비행기 표가 비싸서 한국은 겨울에 한 번만 돌아올 수 있어요. 나머지 두 번은 남아공에서 보냈습니다. 여러 친구와 그 가족이 저를 초대해 먹이고 재워준 덕분에 먼 타향에서도 온기를 느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남아공의 가족은 어떻게 밥을 해 먹고 여가를 보내는지 가까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덕분에 관광객으로 갔다면 미처 몰랐을 곳을 구석구석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친구들, 친구의 부모님이나 친지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이것이 저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자양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아공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게 벌써 십 년 전 일입니다. 수년간 용기를 그러모은 끝에 비로소 그때의 기억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이십 대입니다. 주말 알바를 하며 월세방에 살고요, 매일 일을 하고, 매주 장을 보고, 계절이 바뀌면 이불을 갈고요, 또 때가 되면 이사 집을 알아보며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다 이따금 남아공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온통 고마운 일뿐이더라고요. ‘다 갚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제게 선뜻 온정을 베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세상은 살만하다’는 희망을 되새기곤 합니다.


 누구나 타지에서 낯선 이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 문득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되는 그런 일화가요. 제 이야기를 읽고 그때가 떠오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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