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60점에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실기편
남아공에서 들은 과목 중에 디자인이 있었다.
그림만큼은 자신 있으니 점수가 잘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첫 성적을 받았다.
디자인 60점.
필기가 50점대, 실기가 60점대였다.
필기시험이야 영어를 못하니 그렇다 쳐도,
실기가 60점이라니. 충격이었다.
디자인 실기는 완성된 결과물만 평가하지 않고
디자인 과정 전체에 점수를 매겼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점수는 없었다.
한 학기에 하나의 주제가 주어지고 세 달 동안
B3 크기의 스케치북에 디자인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아이디어가 탄생해서 다듬어지고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담겼다.
주제에 따른 아이디어를 10개 이상 내는 것으로
디자인 과정은 시작됐다. 그중 하나를 골라 발전시키는데,
왜 그 아이디어를 선택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아이디어를 고른 다음에는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보고 다양한 색 조합을 시도한다.
이 때도 '곡선 대신 직선을 사용한 것은 정갈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거나
'파란색보다 흰색이 청결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선택했다'처럼 이유를 덧붙여야 했다.
디자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족한 영어실력도 걸림돌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생각을 단계별로 표현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 60점에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은 어떻게 하나 보니, 기대한 것보다 더 세세하게 사고의 과정을 기록했다.
심지어 중간에 아이디어를 완전히 바꾼 것도 기록돼 있었다.
읽다 보니 친구들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사소해 보이는 것도 다른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면 적어야 하는 것이라
친구들의 일지를 통해 배웠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모조리 쏟아내 보기로 했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아이디어도 빠짐없이 종이 위에 옮겼다.
말로는 설명이 잘 안되니 그림을 최대한 활용했다.
종이접기 안내도를 그리듯 생각을 한 단계씩 풀어서 그렸다.
예를 들어, 태극무늬에서 모양을 따오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태극무늬 사진 위에 내가 원하는 모양을 색으로 표시하고
옆 장면에 그 모양을 같은 색으로 옮겨 그린 뒤
다음 장면에서 또 다른 형태와 합치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시작 지점에서 완성된 이미지에 이르는지를 풀어쓸 수 있었다.
이 디자인 일지를 만드는 데도 디자인이 필요했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사진을 오리고 연필로 글씨를 썼다.
사진과 그림, 글이 모두 균형을 이루도록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해본 끝에
마음에 드는 배치가 나와야 비로소 사진을 풀로 붙이고 연필로 쓴 것을 펜으로 말끔하게 적었다.
해가 갈수록 요령이 붙어 실기 성적은 다행히 빠르게 올랐다.
문제는 영어로 A4 용지 10쪽을 빼곡히 써야 하는 필기시험이었다.
객관식이면 찍기라도 하지! : 필기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