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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Nov 04. 2019

남아공 유학 | 02. 디자인 60점에서 만점으로 ②

객관식이면 찍기라도 하지!: 필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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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페이지를 영어로 세 시간 안에 쓰라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디자인 첫 시험을 쳤다. 문제의 절반도 채 풀지 못하고 시험이 끝났다.

시험에서 해방된 60켤레의 신발이 시험장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간식을 향해 걷는 친구들의 발걸음엔 지친 기색과 후련함이 뒤섞여있었다.

친구들 틈에서 나는 눈 앞이 캄캄했다.

10 페이지. 논술 문 두 개. 세 시간 안에. 영어로.

'앞으로 어떡하지?'


남아공 시험은 모든 문제가 주관식이다.

문제마다 짧게는 세 문장에서 길게는 두 페이지 가량 답을 써야 한다.

디자인 시험은 서술형이 20문제, 논술이 2문제 나왔다.

답안지를 다 쓰면 A4 크기 종이 열 쪽에 달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주어졌다.

세 시간도 나에겐 턱 없이 부족했다.

답을 알아도 즉석에서 문장으로 옮기질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객관식이라면 찍기라도 하지! 욱신거리는 오른손 마디를 폈다 구부렸다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썼는지 보고 배워야 했다.

도서관에 들어가 디자인 서적을 뽑아 들었다.

너무 길고 어려웠다.

문장은 끝없이 이어지고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해도 뜻이 아리송했다.

이런 글을 당장 내가 쓴다는 건 비현실적이었다.


두 번째 시험을 말아먹었다. 전략을 바꿨다.

친구들이 쓴 답지를 빌려다 읽은 것이다.

친구들은 문장을 무척 간결하게 썼다.

한 문장에 하나의 사실만 들어갔다.

매끄럽고 멋진 글을 쓰는 건 어렵겠지만, 단순한 문장으로 사실을 나열하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아공 디자인 수업시간에는 디자인 역사와 현대 디자인 이슈, 그리고 시각요소 이론을 배운다.

디자인 역사로는 미술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부터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는 디자인 사의 흐름과 대표 디자이너들을 배웠다.


미술공예 운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디자인의 변천사를 배웠다. 출처: pinterest.com, cfmracing.com


현대 디자인 이슈로는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빨대 모양 필터', '베네통의 다양성 캠페인 광고', '아프리카 토속 방식으로 지은 현대 건축물' 등을 다뤘다.


식수 부족 문제를 해결한 빨대 모양 필터. 출처: www.1millionwomen.com.au
베네통의 다양성 캠페인. 출처: www.posterlovers.it



시각요소 이론으로는 모양, 색, 문자 등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균형, 대비, 리듬 같은 시각적 문법을 익혔다.


시각 요소들과 시각 원리. 출처: majestykapps.com


이 세 가지가 고스란히 시험에 나왔다. 세 분야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세 문장씩 써보기’가 내가 정한 규칙이었다. 먼저 시대별로 디자이너를 한 명씩 뽑았다.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대표 디자이너는 '르 코르뷔지에'이다.

대표작으로는 '라운지 의자', '빌라 사보아', '빌라 라로슈'가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을 설명하는 문장을 세 개 쓰고, '르 코르뷔지에'를 소개하는 문장 세 개, 각 작품을 묘사하는 문장 세 개 씩을 썼다. 이렇게 해서 각 시대마다 한 단락을 쓸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라운지 의자, 빌라 사보아 외관, 빌라 라로슈 내부 사진. 출처: vntg.com, frenchculture.org, frenchculture.org


역사와 현대 이슈의 지식을 설명하면서 시각요소를 동원해 묘사도 했기 때문에 한 번에 세 분야를 모두 대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미리 필요한 표현을 찾아 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시험장에서 모르는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한번 써 본 문장은 시험장에서 생각도 더 잘 났다.


1학년 1학기에는 50점대를 받았던 내가 3학기에는 논술문 두 개를 처음으로 끝까지 썼다.

2학년 1학기, 성적이 70점으로 올랐다. '나도 하면 되는구나'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일 년 동안 80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나는 노력하는데 안 되는 것 같아 풀이 죽고 화도 났다.

그러던 내가 마침내 3학년, 필기 88점을 찍었다. 실기는 만점을 받았다.

한계에 부딪히던 내가 포기하지 않고 우수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한 분의 선생님 덕분이었다.



디자인 60점에서 만점으로,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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