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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Nov 11. 2019

남아공 유학 | 02. 디자인 60점에서 만점으로 ③

이윽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You have potential."
내게 가능성이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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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어 다시 마음에 한파가 일었다.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가야 할 대학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갈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지 정해야 했다.

합격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학비도 걱정이었다.


2학년 때 꾸준히 오르던 성적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같아서 화가 났고

도대체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몰라 조급하기만 했다.


그 무렵, 한국의 집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화상통화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덤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붙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불안과 혼돈이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몸집을 불려 나갔다.


하지만 디자인 과목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3학년이 된 기념으로 큰 과제를 안겨줬다. 졸업 작품이었다.

주제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포장지'였다.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제품을 보호하는 포장지를 만들어야 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환경을 보호하려면 환경에 무해한 소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신소재를 검색했다. 

기술용어가 많아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직 개발단계에 있는 것들이었다.

이 소재들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낸다 한들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맥이 풀렸다.

'불가능'이라는 벽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숨을 깊게 쉬어. 긴장이 풀려야 좋은 생각도 나는 법이잖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아 걱정할 때면 디자인 선생님께서 해주시던 말씀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어깨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덕분에 가까스로 10개의 아이디어를 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환경문제에 탁월한 해결책은 없었다.


시원찮은 아이디어들을 들고 중간점검을 받으러 갔다.

교실에 선생님과 단 둘이 앉아 여태까지의 디자인 과정을 검토해보는 시간이었다.

잠자코 내 설명을 들으시던 선생님께서는 내 말이 끝나자 안경을 벗고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나도 숨죽여 선생님께서 말을 꺼내시길 기다렸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You have potential."


내게 가능성이 보인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영어학원 강사를 했다.

그때 영어와의 싸움을 포기한 학생들을 여럿 만났다.

학원 복도에서는 초롱초롱하던 눈들이 책상에 앉는 순간 생기를 잃었다.

심한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cat'처럼 간단한 단어를 읽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런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다 함께 문제를 풀었다. 

내 처방은 지문을 해석하는 단계를 아주 잘게 쪼개는 것이었다.

우선 문단에서 한 문장만 떼어놓는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를 모두 찾게 했다.

'Maybe we can buy them.'이라는 문장을 예로 들자면, 

그 위에 조그맣게 '어쩌면', '우리', '할 수 있다.', '사다', '그들'이라고 우리말 뜻을 적게 했다.

"이 단어들을 연결해봐. 무슨 뜻일까?"

그러면 학생은 표정은 심드렁할지언정, 골똘히 생각한다.

이내 "어쩌면 우리는 살 수도 있다?"하고 답을 내놓는다.

"잘했어. 이제 'we'하고 'buy'만 한번 외워보자."

한 번 해석해본 단어이기 때문에 금방 외운다.

'cat'을 외우기 어려워하던 학생도 순식간에 백 점을 받는다.

고작 두 단어지만, 정직하게 노력해서 답을 맞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기억한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받아 드는 순간 아이들의 눈에 '탁'하고 불이 켜졌다.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튼 것이다.


그 날, 내 안에도 그런 불이 켜진 것 같다.


그 이후로 자나 깨나 디자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포장 디자인과 연결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친구가 준 '흰 토끼' 사탕을 먹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든 엿과 비슷한 흰색 사탕이었다.

사탕은 얇은 쌀종이로 한 번, 그리고 비닐 포장으로 한 번 더 싸여있었다.

'비닐 포장을 없애면 어떨까? 아냐. 먹는 음식이니까 쌀종이만으로는 포장이 부실해.'

그럼 먹는 제품이 아니라면? 비닐을 없애도 될까? 예를 들어... 비누!

비누는 물에 적셔 사용하니까 포장이 물에 녹는다면 더 편리하기까지 했다.


'물에 녹는 비누 포장지'로 방향을 정했다.

한번 방향을 정하고 나자 일이 무서운 속도로 진행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디자인 과제에 빠져 살았다.

해가 뜰 때 시작해서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았다.

디자인 과제를 할 때만큼은 온갖 걱정이 말끔히 가셨다.


그렇게 쌀종이를 활용해서 코체 비누로 된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 제품의 포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에 녹는 비누 포장지'로 졸업작품 만점을 받았다.

디자인 반 세 개를 통틀어 만점자는 나밖에 없었다.

60점짜리 디자인이 참 먼 길을 왔구나 싶었다.


지금도 높은 벽에 부딪힐 때면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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