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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ug 17. 2022

어떤 양형 이유

공동체를 위한 이토록 따뜻한 에세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중 으뜸은 단연,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이 대뜸 책을 사 왔다. 내 동생은 책을 많이 읽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전공책 외에 먼저 값을 지불하고 책을 사는 타입도 아니다. 그런 동생이, 사 왔다. <어떤 양형 이유>를.


잠깐 내 동생을 언급하자면, 그 애는 요즘 논문을 쓰느라 바쁘다. 로스쿨도 준비한다. 그래서 도서의 저자가 판사라고 했을 때, 전공책처럼 참고나 사유의 목적으로 샀겠거니 했다. 한참이나 사두고 읽지를 않길래 궁금한 건 못 참는 내가 얼른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챕터만 읽고선 동생이 이 책을 왜 샀는지, 왜 책상 위에 올려두고 너무나도 찬찬히 읽어갔는지 알겠더라. 단순한 법정 에세이가 아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지 앞에서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내비치는, 어떤 나이 든 판사의 고백서 같은 거였다.


바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그의 이름과 얼굴밖에 모르지만, 그의 다정한 말솜씨와 마음을 그리고 그것을 뒤로한 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냉철한 뇌를 사랑하게 됐다.


커버마저 깨끗한 흰색에 군더더기 없는 카피 한 문장이 전부이다.


내가 대학에서 시를 배울 때, 달리 구체적인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주워가며 멋있는 척하는 멋없는 글만 쥐어짜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이 책을 읽고 난 나는, 어떤 글이 멋있는 것인지, 어떤 글이 사람을 매혹시키는지 정확하게 알겠다. 사람을 구하는 다정함에서 비로소 모든 힘이 나온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깨달았다.  


이 사람처럼 똑똑한 머리를, 다정함을 그리고 글재주를 갖고 싶다는 생각. 큰일이다. 좋아하는 것만 깊게 파는 나 같은 사람한테 이 책은 이제 주기적으로 읽어줘야 하는, 쓰다가 막힐 때마다 꺼내보는 마법서 같은 게 될 것이다. 영향받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만 결국은 그의 마음가짐을 따라갈 것이다. 펜을 쥔 사람은 언제나 약자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처럼, 그도 약자를 바라보는 절제된 절절함으로 여백을 채워나갔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두근거린다.




책을 읽다 보면 활자들을 의심케 하는 순간들이 온다. 판사가 아닌 시인의 오랜 기록을 탐독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고, 작가 소개에서 밝힌 즐겨 듣는다는 LP판의 멜로디가 절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문장에는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그저 담백하다. 나는 담백하다는 말을 꽤 좋아하는데, 그는 참 담백하다. 안쓰러운 이유로 법정에 선 피고인을 보는 시선에서는 동정심이 흐르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보는 시선이 참으로 다정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겠다. 이 냉혹한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결국은 힘없는 개인을 어떻게 비참하게 하는지 알고, 그렇기에 안타까운 사건들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정신까지도 너무 멋진 사람. 기회가 된다면 그가 평생 생각날 때마다 적어두었을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을 지경이다. 분명 그 일기들의 파편을 모으면 막연히 상상했던 멋진 시가 탄생하겠지. 동생이 훗날 사회에 나가면 어떤 사람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이토록 멋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적 지위를 압도할만한 직업 정신과 다정함을 지닌 그런.


시를 배울 때, 어떤 교수는 세상에 닥친 불행이 곧 시의 씨앗이 된다고 했고 어떤 교수는 시를 씀에 있어 언제나 약자를 돌이켜봐야 한다고 했다. 시를 사랑하게 된 것도 끊임없이 그런 시선을 거두지 않고 주변을 관찰하는 시인들의 마음 때문이다. <어떤 양형 이유>는 에세이가 아닌 오히려 산문 시집과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시보다 더 슬프고 절절한 것이 현실의 삶임을, 실존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대견한 일임을 책 한 권으로 응축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다정한 마음 씀씀이가 어쩌면 응당 사회가 해야 할 정의로운 옹호 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씁쓸하게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적어도 현실과 인생이라는 치열한 법정 가운데 선 우리들의 처참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다정함은 모든 것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는 한참을 의욕 없이 죽어있던 내 마음도 일으켰다. 다시 시를 써야지. 그리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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