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우울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누군가의 우울은 다른 감정을 끌어오기도 한다.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픔, 우울. 우울증과 우울감은 엄연히 그 뜻과 쓰임새가 다르다. 간혹 두 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우울감이다. 우울을 뜻하는 영단어는 손가락 열 개가 넘어가도록 많으니, 그 깊이와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에 잠식되기 일보직전의 사람이라 오해받기 딱 좋다.
여하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는 시대적 배경이 뒤따른다. 작품의 기본 스탠스가 축축한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보고 자란 것이 패전 후의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일 터인데 거기에서 희망찬 이야기만 하는 것도 괴리감이 있었을 거다. 그는 타고난 기질 중에서도 도덕성이 도드라지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것은 자학적인 몇 문장만 읽어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사실은, 기준치가 높은 도덕성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보고 듣는 것에 예민한 사람은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로도 여겨지나, 그것과 직면한 개인은 끝도 없는 감정의 고리에서 허덕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의 우울을 적당히 흡수하고 적당히 차분해진다. 감정이 가라앉는 순간이 되면 모든 것들을 더 명확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섣부른 판단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의 '우울감'만을 사랑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까지 이르는 데 몇 차례의 실패가 있었고 내가 알기로 다섯 번째 만에 세상과 이별했다. 적당히 아는 것은 행복이고 더 많이 아는 것은 권력이 되지만,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어쩌면 불행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너무 많이 알아서, 더 많이 알고 싶어서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사양에 등장하는 나오지를 볼 때마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오지는 방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반성을 끝없이 하는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사랑과 애정의 마음을 열망한다. 살아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더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불행한 합격 목걸이 같은 것. 공감하는 자만이 불행을 본다. 불행을 본 사람만이 슬픔을 느낀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만이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사양은 모든 서사가 파멸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존재한다. 인간실격과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다. 그 마음은 끈질기고 구질구질하지만, 꼿꼿하고 한결같다. 사람을 사랑하면 한없이 찌질한 모습까지 드러나는 것은 만국, 전시대 공통인가 보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당하게 전달하는 그 마음을, 카즈코를 응원하게 된다. 카즈코를 그려낸 다자이 오사무를 애정하게 된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본인이 남긴 감정의 흔적이 또 다른 감정의 시작임을, 원동력임을 말해주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