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목소리가 영화 속 인물을 완성할 때
박해일, 김윤석, 최민식으로 이어지는 김한민 표 이순신 장군 계보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그들에게 매력적인 목소리가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내가 소리에 받는 영향은 큰 편이다. 사람을 만날 때도 첫인상에서 외형이 주는 임팩트보다 목소리에 있는 묵직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달리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점부터 사람이 내는 소리에 대해 귀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좋은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매력적이었다. 여타 다른 소리들 중에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경향이 있다. 그 소리에 한번 빠지면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소리를 더듬기 위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적도 있었다.
다시 한산으로 돌아와서, <한산>의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 박해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명량>의 최민식 배우가 보여주었던 그 무게를 누가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박해일. 그는 비교할 수 없는 목소리와 차분함이 얼굴에까지 드러나는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산>에서 그는 천천한 목소리 톤과 미묘한 끝 발음 처리로 사람 마음을 흔들어댄다. 아직 관람 전이라면 유의하시길.
사실, <한산>은 작품 그 자체로만 보면 새로운 임팩트를 주기에 힘든 소재이기도 하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산>은 이런 내 쓸데없는 생각을 소리로 잠재웠다.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박해일은 물론, 안성기, 변요한에 이르기까지 목소리 좋다는 배우들이 스크린에 연이어 등장했다. 게다가 후반부에 나오는 거북선 특유의 알 수 없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거북선이 등장할 때는 소리 없는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앞자리 관객분들은 후반부에 가선 상체를 앞으로 빼고 영화를 보시던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대한민국 만세. 이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영화는 호불호는 물론, 회의적인 이들에겐 어쩐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산>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니 적나라한 승리에 한 번쯤 흠뻑 취해도 될 일이다. 영화 내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거북선'의 서사를 조금 더 보고 싶은 아쉬움은 있었으나, 한산도대첩에 담을 역사기록이 너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분배였을 터다.
전쟁 영화를 볼 때, 특히나 소리는 중요하다. 배경음악은 물론 특수 음향까지도. 생사가 오가는 상황일수록 인물의 성격은 액션보다 목소리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작품 초반에 일본 군 대사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두려움은 전염병이다.' 이 대사는 반대로 한 번도 목소리에 떨림이 없는 채로 전쟁에 임한 이순신 장군을 대변한다. 김한민 감독이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가 더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악몽을 꾸었을 때도, 일본군에 의해 출정 전 배가 불탔을 때도 박해일이 연기하는 장군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내면 속 어지러움을 절대 소리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관된 차분함. 그것이 <명량> 때와는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아닐런지.
솔직하게 <한산>을 본 것은 오직 박해일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나는 <헤어질 결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가 가진 목소리를 놓아주지 못했다.
한산을 보고 난 후, 앞으로 더 기대되는 세 가지 지점이 있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노량>의 이순신은 어떤 목소리를 지녔을까, 가 첫 번째. 두 번째는 거북선 단독 영화를 누군가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기대 혹은 바람. 세 번째는 박해일이 추후 어떤 영화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설렘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베니(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책 낭독 영상을 재생하면서 잠들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박해일도 책이든 사연이든 낭독하나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김현민 감독의 연이은 이순신 장군 캐스팅은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과 묵직함을 염두에 두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박해일의 다음 작품도 작품 속 목소리도 기대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