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것
가을이다. 이맘때가 되면 로맨스 영화를 봐야 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타이밍은 가지각색이지만, 헤어지는 이유는 한 가지일지도 모른다. 상대와의 미래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아서. 미래라는 것은 모호하고 추상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에 몰아넣는다. 예측되지 않아서 눈앞에 있는 상대를 평가하게 하기도 한다. 일본 로맨스 영화는 국내 로맨스 영화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미장센처럼 의미를 더하는 장치나 맥거핀처럼 의도적인 헛발도 대체로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다. 여기서의 현실적이라 함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느끼는 찌질한 감정의 모든 것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미다. 부가적인 사이드 스토리의 존재보다는 두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느낌. 그래서 영화라기 보단 드라마에 가깝고, 드라마라고 하기엔 다큐멘터리와 더 닮아있다. 나는 그 감정선을 좋아한다. 무게도 없고 꾸밈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사랑과 많이 닮아있다.
키누와 무기는 우연하게 만나, 우연히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사랑에 빠진다. 고백할 타이밍도 재고 따질 만큼 조심스럽게 관계를 시작하지만, 여느 사랑이 그렇듯 그들도 현실 때문에 헤어진다. 영혼을 나눴다고 해도 믿을 만큼 공통분모가 비슷해도, 결국 사람이라서. 잘 맞는 백 가지보다 한 가지의 불안함을 무시하지 못한다. 끝끝내 헤어지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고, 그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골자는 함께 할 미래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벌써 주변에서 '결혼'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 혼자 낯선 세상에 빠져 있는 기분이 든다.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본 적 없다. 막연히 떠올린 내 미래는 여전히 한 손에 펜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다이어리를 끼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시를 쓰거나 영화를 보거나 케이크를 먹는 모습이다. 평생을 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걸까. 의문도 든다.
꽃은 때가 되면 시든다. 꽃다발도 마찬가지. 크기가 크고 예뻐도 아름다운 것들은 때가 되면 빛을 잃게 되어 있다. 사랑은 다를까?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랬다. 그렇다면 다들 나머지의 해는 어떤 감정을 채우고 사는 걸까. 꽃이 지고, 꽃잎이 바스러져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함께 걷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
가끔 어떤 관계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꼭 나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직 진짜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꽃다발 속 꽃을 정성스럽게 말려서 바스러지지 않도록 오래 간직하는 사람들, 미래를 함께 걸어갈 사람을 발견한 그들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된 사람들일 테다. 예측되지 않는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거니까.
추위가 마음을 훌치고 갈 때마다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어 진다. 이토록 현실적인,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서 미래를 그릴 줄 모르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위안을 얻는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가 그려진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꽤 어색하겠다. 그러나 둘이서 함께 먹는 케이크와 함께 쓰는 다이어리라면, 조금은 귀여울지도. 그런 날이 오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그 미래를 걷게 될까? 정말, 가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