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장면 없이도 인간은 잔인하다
착한 사람의 기준은 뭘까? 문득 궁금해진 어느 날, 넷플릭스를 염탐하다가 발견한 괴기스러운 포스터가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서클> 되시겠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픽한 강렬한 포스터와는 달리,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그다지 임팩트 있지 않은 건 아쉬웠다. <서클>은 보여주는 강렬함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철학적 무비와 더 가까워 보인다.(지극히 주관적 생각) 하필 제목이 서클인 것도, 정말 동그라미로 모여 있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만, 여기서도 외계인 혹은 정체모를 존재가 등장하지 않은 건 좀 아쉽다. (가성비 넘치는 서스펜스...)
착한 사람이라는 기준은 제각각이다. 그 경계나 기준도 모호해서 사실 오늘 착한 사람이 내일 다른 사람에겐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아리까리한 질문에 한 가지 기준을 넣어보자. 바로 '생존'이다. 너 착한 사람 되면 죽어, 그래도 착한 사람 될래?라고 물으면 어느 누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할까? 그런데 이러한 질문, 웃음으로 무마하고 넘어가기엔 꽤나 심도 있다. 우리는 이제 착하게 살면 호구라고 한다. 착함의 미덕은 성장과 발전, 주머니와 부동산 키우기에 사라진 지 오래다. 죽음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착함을 모두 포기하며 산다. 그러면서 <서클>을 보며 욕지거리를 하는 모순도 보인다.
"너 살려줄게. 대신 어린 아이나 임산부를 죽이도록 '투표'해."
이토록 패륜적인 설정은 '죽여라'가 아니라 '죽이도록 투표해라'에서 그 잔인함이 반감되는 착각을 불러온다. 영화에서도 '집단지성은 무조건 옳다'의 패착이 잘 드러난다. 외계인을 가져다 놓은 설정이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제 어떤 잔인한 일이든 다수결 앞에서 무뎌지고 있다는 걸, 혹은 이미 무뎌졌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당장 죽을 판인데 '착함'을 앞세울 수 있나? 의 딜레마가 생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영화를 보며 욕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면서 완벽히 '안전한'상태에서만 도덕성을 앞세울 수 있을 거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쩌면 <서클>의 감독이 염원이자 바람이 엿보였는데, 영화 속 주체가 된 인물 외에 다른 서클에서 나온 마지막 생존자들은 대부분 여성 혹은 아이였다는 점. 그 사실이 꼭 옳다고는 볼 수 없겠다. 다만, 무리 안에서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누군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우리는 누굴 살리고 또 누굴 죽일 것인지 그 기준은 누가 어떻게 세우는 것이며 어떻게 그러한 보편적 사고가 생겼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당신은 착한 사람인가? 끊임없이 착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 <서클> 만일, 우리가 한 서클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대도 어느 누가 우리를 욕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는 누구나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비참한지 욕하게 될지니...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인간의 잔인함을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