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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사랑의 다른 이름

by 서은율


한 시인은 '사랑'을 '멸종'이라고 표현했다. 신파와 예술의 차이는 '낯설게 하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문학이론 책 첫장에서 읽었었나, 불현듯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것인데,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에 길들여 있던 나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지, 사랑은 그리움이고 인내며 헌신이지, 매번 뻔한 얘기만 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좀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내게 사랑은 이제 '열정'이 아닌 '연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누군가가 애틋한가'라고 묻는다. 뒷모습을 보면 짠한 사람이 있다.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쪽인가, 뒷모습을 보여주는 쪽인가.


피아노 선생님이 피아노 음을 질질 끌고 있는 내게 한 말이 있다. 서 선생님은 헤어질때 마지막까지 아쉬워하고 손 흔드는 사람이죠? 나는 피아노 선생님께 항상 나를 들키고 만다. 나를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돌아서서 가는 이의 모습을 두 번, 세 번 바라보다 뒤돌아서는 나라는 사람. 하지만 그 정이 감당이 안 될 때면 도마뱀이 꼬리 자르고 도망가듯, 단번에 사람을 잘라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단 한 순간에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도 유효기간이 있어서 몇 번의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 기회가 다하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식어버린다. 생존본능처럼 말이다. 그래놓고 마음이 약해지면 다시 뒤돌아본다.


'연민'이 언제나 발목을 잡는다.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연민을 느끼는 대상은 남편이다. 나는 가끔 남편이 너무 불쌍하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고, 나는 그것에 동조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힘든 상황이거나 감정적으로 감당이 안되는 순간이 와도 다시끔 마음을 다잡곤 한다. 각인된 그의 뒷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연민한다는 것, 당신을 책임지겠다는 말이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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