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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뜨로핏 Rettrofit Dec 18. 2024

EP11. KBS TV쇼 진품명품에 감정을 의뢰한 이유

표준이 되지 못한 한글 자판 3종 공병우식, 김동훈식, 장봉선식

방송화면 캡처 이미지. 출처 KBS 쇼 진품명품 홈페이지 다시 보기


2023년 10월  8일 일요일에 영한 KBS TV쇼 진품명품 1393회에는 제577돌 한글날을 맞이해 근대유물로 3점의 한글 타자기가 감정품으로 등장한다. 방송은 다시 보기로 시청이 가능하다. 방송은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가 제공되고 있으니 시청을 하고 보면 이번 에피소드를 이해하는데 더 좋을 듯하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TV쇼 진품명품에 필자가 타자기 감정을 의뢰한 배경과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타자기 감정 의뢰가 채택되어 방송에 나가기는 했으나, 결론적으로 필자가 의도한 메시지가 방송을 통해 제대로 전해지지는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그때 전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가치의 무게감이 주는 사명의식 使命意識

2022년 5월 경이니 타자기 수집에 몰입한 지 만 2년 차에 접어들 때, 필자는 이미 박물관에서나 소장할 만한 가치의 타자기를 3점이나 수집하게 되었다. 공병우 세 벌식 체재타자기, 장봉선 다섯 벌식, 김동훈 다섯 벌식 타자기이다. 장봉선 타자기를 21년 7월경에 구입했고, 공병우 체재 타자기를 22년 3월경에,  그리고 두 달 후인 22년 5월에 김동훈 타자기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희소한 타자기들을 모두 ‘당근마켓’을 통해 구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지역 기반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이 아니었다면, 아마 오늘의 타자기 덕후 레뜨로핏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뿐만 아니라 타자기 수집 외에 당근마켓에서 타자기를 판매한 사람과 그의 사연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당근마켓의 홍보대사라도 자처할 수 있을 만큼 당근마켓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당근마켓은 자기가 사는 지역 기반의 중고 거래 플랫폼이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세 가지 타자기는 모두 필자가 사는 지역의 당근마켓이 아닌 타 지역에서 구매했다. 장봉선타자기는 용산구 후암동, 공병우 체재타자기는 서초구 방배동, 김동훈 타자기는 경기도 가평군까지 가서 구매를 해 왔다. 그 외 인천, 경기, 충북 괴산, 경남, 제주도까지 거의 전국구로 당근마켓을 이용해 타자기 수집을 하였다. 당근마켓을 이용한 구매방법에 관해서 나중에 따로 정리를 해 보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어찌 보면 정말 행운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입문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초보자이런 귀한 타자기들을 수집하다니... 때로는 타자기 동호회 회원들에게 수집한 타자기를 소개하면서 성취감에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성취감은 잠깐 흘러가는 기분일 뿐이었다. 그렇게 성취감에 도취되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렇게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수록 필자에게는 묘한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타자기에 대한 역사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한 장식용 고철덩어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돈이 있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도 했다.



그것이 타자기가 나에게 주는 절대적 매력이었다.



어떤 물건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점. 그렇다면  “과연 내가 이런 귀한 타자기를 사유(私有) 해도 될 만큼, 타자기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것인가? ” 그때부터 ‘타자기’라는 물건이 가진 가치의 무게감에 걸맞은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내가 수집한 타자기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취미로 즐기기 위해서 사 모으던 향유의 물건에서 어느새 타자기는 나의 중한 연구 대상이 되어버렸다. 소위 말하는 '덕질'의 폭이 좀 더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 모으는 것도 덕질이요. 사 모은 물건에 대해 연구하며 파고드는 것도 덕질이다.




오롯이 하나에 집중하며 즐기는 시간, 그것이 '덕질'이 아닐까?




어쨌든 타자기의 수집과 복원 그리고 연구를 통해 나의 덕질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즐기는 시간도 있었다. 장봉선, 김동훈의 다섯 벌 식 타자기들은 모두 자판의 입력 방법에 대한 매뉴얼이나 정보가 따로 없었기에 직접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일일이 눌러보면서 자판의 입력 방법을 퍼즐 맞추듯이 익히고 다른 타자기들과 비교해 나갔다. 그 기분은 마치 비밀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암호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흥미롭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특히 공병우 타자기의 경우는 같은 세 벌 식이더라도 종류도 다양하고 자판배열도 계속 진화하여 입력방법도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적잖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각각의 타자기마다 다른 입력방식을 알아가는 공부도 재미있었지만, 한글기계화 역사에 대한 공부도 흥미로웠다. '공부'라는 것이 그전에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카페나 블로그에 올려진 정보를 읽는 정도였다면, 방법적으로는 책이나, 논문, 과거의 신문 등의 자료를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학술자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한글기계화에 대한 검색을 하니 적지 않은 자료를 읽어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한글 표준자판과 관련한 정보도 검색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찾아서 읽었다. 학술적인 자료는 때로는 어렵기도 했다. 읽는다고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반복해서 읽거나 다음에 다시 읽기 위해 자료를 덮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잠깐 신문의 유용함을 예찬을 하자면, 신문 기사 중에는 더러 어려운 글의 기사도 있지만, 신문의 독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체가 간결하고 읽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사진 자료가 첨부되어 있기도 하고, 기자들이 이미 검증과 확인을 거쳐서 쓴 글이므로 신뢰성 또한 높다. 매일, 매일 발행되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사건의 타임라인 재구성도 가능하다. 그리고 검색의 수월성이나 접근성도 높다. 네이버의 뉴스페이지로 가면 <라이브러리>가 있다. 여기에는 거의 1900년대의 신문까지 검색이 가능할 정도로 신문자료의 양이 방대하다. 여기서 키워드 검색으로 ' 타자기'만 입력해도 엄청난 양의 기사가 검색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읽어도 읽지 못할 만큼 엄청난 자료가 검색된다. 그 덕분에 논문이나 책, 신문기사 등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한글기계화 역사나, 정부의 한글 표준자판 제정과 관련한 일련의 과정을 알게 되면서 필자 나름대로 비판의식도 생기고, 내 나름의 주장이나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립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표준'은 곧 생존의 문제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나라 한글 표준자판이 정해진 역사는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병우, 김동훈 등 민간의 전문가나 개발자들이 하나의 표준자판으로 합의안 도출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정부가 민간의 전문성과 투자나 노력을 무시하고 결국 행정력으로 밀어붙인 결과, 민간시장에서 기존에 이용하던 세 벌 식이나 다섯 벌식 이용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조금 덧붙이자면 사실 세 벌식과 다섯 벌식 자판을 하나의 합의된 안으로 도출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본다. 직접 타자기의 자판배열과 입력구조를 경험해 보면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네 벌식 자판이 세 벌식과 다섯 벌식을 절충하여 억지로 만든 결과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오히려 세 벌식과 다섯 벌식을 함께 표준으로 정하여 속도 타자기의 표준은 세 벌식으로, 체재 타자기의 표준은 다섯 벌 식으로 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정부에서 밀어붙이니 관공서나 군대, 학교 같은 공공기관에서도 정부표준자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결국 공병우박사나 김동훈 같은 개발자들의 한글 자판은 정부 표준 자판에 타자기 시장을 잠식당하며 도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정부 표준자판으로 인해 시장을 잠식당한 한글 타자기는 공병우와 김동훈의 타자기의 피해가 가장 컸을 것이다. 실제로 정부 표준 자판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 타자기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타자기는 공병우 세 벌식 타자기가 약 60%, 김동훈 다섯 벌식 타자기가 약 30%, 그 외 장봉선, 백성죽 타자기 등의 타자기들이 약 10% 정도를 점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서 필자는 답답함과 분노감 마저 들었다. 한글표준자판과 관련한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대중들은 알고 있을까? 아마 대부분 모를 것이다. 우리가 직장이나 학교에서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의 자판이 '한글 두 벌식' 자판이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표준 자판인 네 벌식이나 두 벌식 자판이 어떤 과정으로 표준 한글자판이 되었는지? 정부 표준자판 외에 세 벌 식이나 다섯 벌식 등의 다른 한글자판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자판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일도 없다. 이런 사실은 한글의 역사나 자판체계를 연구하는 학자, 전문분야의 이해관계자가 아니면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표준이 되지 못한 한글 자판에 대한 애정이 더 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타깝은 마음이 타자기를 방송에서라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글꼴이 가장 예쁜 3종의 한글 체재타자기    

필자가 방송을 고려하여 직접 타이핑하여 타자기와 함께 보낸 타이핑 샘플들  ©Rettrofit


진품명품에 감정을 의뢰한 세 점의 타자기는 표준이 되지 못한 자판이라는 공통점과, 글꼴이 예쁜 '체채 體制 타자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방송에서는 타자기를 부르는 이름 때문에 공병우타자기만 체재타자기라고 했으나, 사실은 진품명품에 내 보냈던 타자기 모두 다 "체재타자기"라고 분류하는 것이 맞다.

체재타자기의 개념 설명

방송에서 이런 개념까지 바로 잡아주기에는 좀 힘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기다려왔다. 체재 타자기에 대한 개념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니 이미지의 내용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방송에서는 김동훈 타자기의 활자가 가장 예쁘다고 소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정설인 것처럼 언급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취향에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다. 이미 3종의 타자기는 '체재타자기'로 분류되어 각 타자기별로 개발자가 지향하는 글꼴스타일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래서 '김동훈식', '장봉선식'이란 개발자의 이름이 함께 지칭되는 이유도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예쁜 글씨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그 선호도가 다를 수 있으므로 결국 판단은 사용자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경우는 김동훈식 타자기의 글꼴도 좋지만, 공병우 체재타자기에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이건 글꼴의 차이도 있지만 자판배열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공병우 세 벌식의 경우는 속도타자기나 문장용 타자기, 세종타자기, 한영타자기 등 세대별로 자판이 계속 진화하면서 조금씩 배열이 달라졌다. 출시 당시에는 글꼴이 이쁘지 않다고 '빨랫줄 글꼴'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지금이야 오히려 공병우 타자기 활자의 타입페이스가 더 개성 있는 글꼴로 사랑받고 있으나, 6~70년대에 타자기를 쓰는 공무원들은 탈네모꼴의 공병우 타자기의 글꼴을 이쁘게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공병우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체재 體制타자기도 따로 제작했었다. 하지만 공병우의 체재타자기도 속도면에서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김동훈식 타자기는 개발 단계부터 옆초성과 윗초성으로 초성을 두 벌, 받침이 있는 종성과 받침이 없는 종성 두 벌, 그리고 받침이 되는 종성 한 벌로 총 다섯 벌식의 구성으로 정서된 네모꼴의 글자체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정갈한 글씨로 문교부나, 법원, 체신부 등의 공무원과, 무역 등의 민간 기업에서 주로 많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중고거래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자기들은 주로 정부 표준자판이 적용된 네 벌식, 또는 두 벌식 타자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타자기를 즐기는 취미가들에게도 이쁜 글씨의 타자기는 늘 선망의 대상이다. 혹은 이런 타자기들의 존재 여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부분까지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 방법을 고민하다가 생각이 난 것은 방송매체였는데, 하나는 라디오, 다른 하나는 TV방송이었다.

 


한글날, 잊혀 가던 한글 타자기 다시 알리기

가끔 퇴근길에 MBC 라디오에 <원더풀 라디오. 김현철입니다>를 즐겨 들었는데, (지금은 개편되었다) 항상 오프닝에 타자기 타이핑 소리를 배경으로 현디(DJ김현철의 애칭)가 그날의 주제 같은 코멘트를 읽어 주었는데 그게 참 좋았다. 그리고 라디오 코너 중에 '원더풀차차차'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여기서 애청자들의 N연차에 접어든 다양한 사연을 받아서 소개를 했다. 그래서 타자기 수집 3년 차에 접어든 사연을 보냈는데, 소개되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KBS TV쇼 진품명품에 타자기의 감정을 의뢰하는 방식으로 한글 표준자판의 역사에 대해 소개를 하고자 알아보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서 감정의뢰 접수 방법을 살피고, 이메일로 접수하면 이를 검토하여 감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검토를 PD나 작가 중 누가 하는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의도를 잘 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당시에 타자기 공부를 하며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들을 총 망라하여 장문의 이메일을 작성해서 보냈다. 시기적인 타이밍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왕이면 한글날 특집으로 표준이 되지 못한 한글타자기 감정의뢰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송 아이템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2023년 8월 19일에 이메일을 보냈고,  약 20일이 지난 9월 8일에 KBS TV쇼 진품명품팀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메일로 감정의뢰가 채택되었다는 회신메일은 없었다. 작가로부터 전화가 오면서부터 녹화일정에 대한 통보와 감정을 의뢰한 타자기들의 배송과 관련한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 조율을 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10월 8일에 방송예정인데, 녹화는 9월 21일에 진행이 되었다. 조정의 여지는 없었다. 그냥 정해진 날자에 필자가 무조건 맞춰야 하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된다. 방송 녹화 때 직접 나와서 타자기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요청도 받게 된다. 당연히 직접 가서 설명을 하겠노라 답을 했다. 그런데 녹화는 주말이 아니라 평일 오후였다. 직장인이 평일 오후 녹화를 가려면 연차나 반차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작가들의 연락을 받으면서부터 뭔가 진행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프로그램의 담당작가가 세 명이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다 나지는 않지만, 세 명의 연락처가 다 저장된 것으로 보아 세 명의 작가들의 전화를 돌아가면서 받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직장 업무 상 중요한 회의가 잡히고 말았다. 녹화날짜와 시간까지 완전히 겹쳐버렸다. 내 의지대로 회의시간을 조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방송녹화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잡힌 회의일정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 날을 위해서 준비한 시간과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타자기를 감정의뢰한 나의 의도를 직접 나가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속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가들도 내가 당연히 시간을 맞출 것이라 생각했었는지, 타자기에 대한 설명이나 시연에 대해 걱정하는 눈치였다.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한 대안은 타자기 전문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필자를 대신하여 방송에 출연한 타자기수리 및 복원 전문가 안병조 님

감정의뢰자를 대신해서 방송에서 저 중요한 타자기 세 점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필자의 타자기를 모두 수리해 주었던 타자기 수리, 복원 전문가인 안병조 님이다. 타자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시흥 안 선생님'으로 통하는 분이다. 방송작가들도 그 사이 리서치를 했는지 필자가 대안으로 안병조 님을 언급하자 자기들도 알아봤는데, 그분께 여쭤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통화를 해서 방송에 나가셔서 타자기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처음에는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셨지만 부탁을 드린 끝에 수락을 하였다. 그리고 방송이 나간 후에 시간이 좀 흐르고 내가 타자기 수리를 맡기러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작업실 벽면에 방송장면을 캡처하여 인화해서 벽에 걸어두시고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매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방송작가분들도 녹화 준비에 바빴겠으나, 필자도 방송촬영 날짜가 정해지고부터 바빠졌다. 타자기를 가지러 오겠다는 날짜에 맞춰 타자기 점검도 다시 하고 타이핑을 해 보면서 타자기의 특성을 보여 줄 수 있는 타이핑 샘플도 일일이 준비를 했다. 타자기의 시리얼번호로 확인해서 타자기 제조 년도까지 상세한 정보까지 자료를 제공했다. 영상으로 타자기를 처음 받았을 때 플래튼의 잠금장치 해제부터 타이핑 방법까지 설명을 담아서 작가들에게 보내 주었다.


포장 후 대기 중인 타자기들(왼쪽),  방송작가들이 방문하여 주고 간 인수증과 명함(오른쪽)


타이핑 샘플 다음으로는 배송준비이다. 처음에는 위탁된 배송사가 오는 줄 알았는데, 방송국 차량으로 작가가 직접 감정의뢰품을 가지러 온다는 것이다. 평일이어서 필자가 출근 후 집에 없는 시간이다. 다행히 그때 집에 배우자가 있었던 덕분에, 타자기는 작가에게 잘 전달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배우자가 인수증과 작가들이 주고 간 명함을 같이 내민다. 당시 만에하나 감정의뢰로 타자기를 배송하는 과정부터 방송국에서 감정, 촬영하는 과정에서 파손이나 문제가 생기는 것에 대한 보험을 물어봤는데, 인수증을 보니 역시 방송국이라 그런지 그런 대비들이 철저하게 되어있음을 확인했다.  


녹화현장에 도착했을 당시의 현장사진 ©Rettrofit

방송녹화 당일. 회의가 끝나자마자 시간차를 내고 외근 나갔던 장소에서 바로 여의도에 있는 KBS로 달려간다. 방문증을 받고 작가와 연락을 하여 녹화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타자기 감정부터 시작한 첫 번째 녹화는 끝이 난 상태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번째 감정의뢰품을 가지고 녹화 중이었다.  그날 방송에 패널로 참여한 사람은 배우이자 방송인 이승신, 성대모사의 달인 코미디언 최병서, '문어의 꿈'으로 유명한 가수 안예은이었다. 방송국에서 나의 타자기 감정단으로 나온 패널들이라서 그런지 더욱 친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녹화 중간에 도착을 하여 다들 촬영에 집중하고 있어서 나도 일단은 방청석에 조용히 앉아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 대신 방송에 출연했던 시흥 안 선생님은 촬영을 마치고 바로 다음 일정으로 이동을 한 후였다. 그렇게 방청객에서 세 번째 감정의뢰품까지 촬영을 마치고, 진행자인 강승화 아나운서와 패널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작가들이 촬영 후 다시 포장해 놓은 타자기를 인수받는다. 혹시나 촬영은 어떠했는지 물었지만, 이야기를 나눌 경황이 없어 보인다. 감정가도 혹시 물어보니 정확하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방송을 보고 직접 확인해야 할 듯하다. 친절하게도 방송국 측에서 준비한 승합차량에 타자기를 실어서 집까지 태워주었다. 기사님과 단 둘이서 다소 어색한 듯 적막이 흐르는 시간이 흐른 후 집에 도착하면서 방송촬영의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방송을 보고 나서

녹화촬영날 이후 방송날까지 어떻게 편집해서 나올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렸다. 방송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녹화 당일 어떻게 해서든 갔어야 했는데, 직접 가서 설명을 못한 것이 큰 후회로 남았다. 아마 필자도 당일 녹화스튜디오 카메라 앞이었다면, 많이 떨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 대신 출연했던, 안병조 님도 방송을 보니 긴장하셔서 제대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다 전하지 못하신 듯했다. 당연한 것이다. 전문 방송인이 아닌 사람이 그 큰 카메라와 조명 앞에서 평소와 같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본 없이 자기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방송에서 패널들이 최종감정가를 정하기 전에 감정위원에게 질문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감정위원의 대답 중 일부를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방송화면 캡처 이미지. 출처 KBS 쇼 진품명품 홈페이지 다시 보기

첫 질문이었다. 타자기의 희귀도 순서. 답변대로 장봉선-김동훈-공병우 순으로 희귀하다고 했다. 필자도 이 대답에 있어서는 공감한다. 희귀도는 결국 뒤집어 생각하면, 점유율과 반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점유율이 가장 낮았던 장봉선 타자기는 지금 오히려 더 희귀한 타자기가 되었고, 그다음이 김동훈 타자기이고, 60% 이상 시장을 점하던 공병우타자기가 당시에는 점유율이 가장 높았으니 지금 희귀성 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방송화면 캡처 이미지. 출처 KBS 쇼 진품명품 홈페이지 다시 보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오류가 있었다. 공병우 타자기가 현재 얼마나 남아 있는지? 에 대한 답변은 사실 그 누구도 답 할 수 없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6~70년대 점유율이 가장 높은 타자기가 공병우 타자기였으니 그 많던 공병우 타자기는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 개체수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정확한 수치로 이야기할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걸로 딱 50대를 기준으로 50대 전 후로 있다고 한 답변은 사실 필자가 보기에는 적절한 답은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한창 공병우타자기가 많이 팔렸을 당시의 데이터 정도만 언급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방송화면 캡처 이미지. 출처 KBS 쇼 진품명품 홈페이지 다시 보기

마지막 질문인 타자기 3대 각각 가격차이를 물어본 질문의 답변에도 오류가 있다고 본다. 앞서 첫 번째 질문의 답에서는 희귀도 순서가 장봉선-김동훈-공병우 순이라고 했다. 그런데 큰 차이가 없다고 답했다. 기본적으로 베이스가 되는 타자기의 브랜드나 기종에 따라서도 가격차이가 있을 터인데, 그런 부분은 반영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였는지 모르다. 큰 차이가 없다는 답변은 참으로 모호하고 자신 없는 답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감정위원이 타자기만 전문적으로 연구하신 분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점도 고려해서 봐야 할 부분 같다.


감정가보다 더 중요한 가치

방송화면 캡처 이미지. 출처 KBS 쇼 진품명품 홈페이지 다시 보기


감정위원이 감정가 산출에 기본으로 잡았던 세 가지 감정포인트는 모두 합당한 기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한글 기계화의 산 증거물로써의 타자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조금 비판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결정적으로 우리 한글 기계화 역사의 가치가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감정위원이 그런 부분까지 언급을 해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감정포인트인 희귀성에서는 타자기가 한창 전성기이던 시절의 타자기의 생산 통계나 유통규모에 대한 자료조사와 당시의 통화가치와 현재의 통화가치가 비교되어 같이 제시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세 분의 패널들이 최종적으로 기입한 감정가이다. 똑같이 설명을 듣고 직접 눈으로 타자기를 보았음에도, 패널마다 생각하는 감정가는 차이가 많이 났다. 패널의 역할은 시청자에게 더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기 위해 투입되는 조미료 같은 역할이다. 이들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해 내었다. 그들이 타자기나 한글기계화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감정한 가치인데, 1억, 10억을 적었다 한들, 그것은 숫자에 불과 할 뿐, 필자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지는 않았을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정확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고, 지난하고 치열했던 한글기계화의 역사는 아직도 그만큼의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본 것이었다.



최종 감정가에서도 오류 있었는데, 첫 번째 질문의 답에서 감정위원은 희귀도 순서가 장봉선-김동훈-공병우 순이라고 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사실 장봉선 타자기가 가장 비싼 감정가가 적용되었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장봉선 타자기만 스탠더드급의 대형타자기였다. 이런 오류들이 필자로 하여금 감정가에 대한 신뢰를 크게 주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타자기의 감정가가 궁금하거나, 부동산처럼 호가를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감정의뢰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구상했던 대로 한글날 특집으로 방송에 나가서 한글기계화 역사와 표준이 되지 못한 타자기들을 소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당시 아쉬웠던 부분은 이렇게 글로 정리를 했으니, 언젠가 이 글이 책이 되어 다시 대중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완벽한 성공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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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타자기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벌'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여 부록처럼 첨부해 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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