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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 Aug 09. 2021

홍콩 원정기 3 : 캐리어에 담긴 면접의 깊이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부터 나의 시선은 줄곧 캐리어를 향해 있었다. 흡사 이민이라도 갈 때 쓸법한 캐리어는 바닥에 활짝 펼쳐진 채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여유만을 남긴 크기에 면접이 끝나고 여행이라도 가는가 싶어 잔뜩 부러움을 표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이고, 나도 그런 거면 좋겠는데 출근해야 해서 3일밖에 못 있는다. 근데 오픈데이는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매번 다 가지고 다니는 거지!”




나의 첫 번째 외항사 승무원 면접은 그야말로 수풀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은 것과 다름없었다. 혹시나 싶어 들어갔던 항공사의 커리어 사이트에서, 나의 해외 체류와 겹치는 면접 일정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시작은 우연이라는 말처럼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긴장으로 그르친 지난 면접들의 굴레로부터 줄곧 벗어나길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합격하는 일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면접이 주는 긴장의 무게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 면접에서 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에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떠나게 된 해외 면접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하곤 했다. 이를 위해서는 면접에 대해 무겁지 않고도 낯선 암시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행도 하고, 영어도 쓰고, 면접도 보는 일이라며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참을 수 없는 긴장의 무거움을 지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암시에 잘못된 최면이라도 걸려버린 걸까. 가끔은 이러한 낯선 암시가 해외여행에 대한 면죄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취업 준비생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여행이란 단어도 면접을 구실 삼아 합리화시키곤 했다. 특히, 면접에 떨어지고 나면 으레 찾아오는 텅 빈 시간들을 두고 , 탈락의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여행의 즐거움을 탐색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 마주한 언니의 캐리어였다.



자칫하면 이틀, 길어야 사흘 일정의 면접이었지만 J언니의 캐리어는 여정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손에 익은 드라이어, 모발의 볼륨을 살려주는 샴푸와 린스, 본품 그대로의 스킨케어 라인, 옷걸이채 주름 없이 담긴 면접복 등. 언니의 캐리어는 면접이라는 세계를 가능한 한 최대로 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면접은 딱 18인치 크기만큼의 모습이었다. 가방의 크기에 맞추느라 반으로 접힌 자국이 선명한 면접복, 조금이라도 부피를 줄여보고자 엇갈려 놓은 구두, 당장 며칠만을 보내기 위한 샘플 몇 개와 여행용 세면 용품 세트까지. 같은 방 안에 놓인 두 캐리어는 크기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언니의 캐리어는 낯선 곳에서도 일상을 유지함으로써 가장 본인 다움을 나타내고 있던 반면, 나의 가방은 새로운 여정 앞에 일상을 한 껏 제쳐둔 모습이었다.



하긴 면접만을 보러 온 사람과 면접을 보러 온 김에 여행도 꿈꾸는 사람의 태도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이렇게 다시 보니 캐리어는 마치 면접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의 깊이 또한 한껏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긴장을 버리자고 시작한 가벼운 마음가짐을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J언니의 캐리어에 내적인 찬사를 보내며, 고작 18인치만큼의 마음가짐으로 면접을 마주한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시작도 전에 다음을 그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낙인과도 같은 면접복의  주름을 지워내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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