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 글을 시작했을 때 나의 목적은 철밥통이나 워라밸로 포장된 공공부문의 실체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조명해 보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내가 그려낸 모습은 공공부문의 부끄러운 민낯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언가 충분치 않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에 더 적나라한 이야기 몇 개를 추가한들 결국 뻔하고 자극적인 폭로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아 급하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공공부문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선망하고 있는 직장이다. 그래서 여전히 높은 진입장벽으로 무장하고 있다. 몇몇 그 장벽을 무력화시키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높은 장벽만큼이나 여러 면에서 우수한 인재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의 글로 인해 공공부문이 주류 의식에 사로잡혀 맡은 바 책무를 무시한 채 개인의 영달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 글이 일반인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공공부문의 깊숙한 내면을 들추고 있으나 그것은 정말로 파편적인 한 단면일 뿐이다. 그 모습이 대한민국의 공공부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나의 삐딱한 시선과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건 건전하고 바람직한 방식으로만 운영될 수 없다. 전 세계를 호령하는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라도 우리가 찬양하는 효율성과 합리성만으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그런 부정적인 일면을 부각한 책들은 시중에 무수히 많이 출간되어 있다. 공공부문도 다르지 않다.
내가 처음 공무원이 되고 1년을 채우지 못했을 때, 조직에서의 존재 의의와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을 때 우연찮게 만났던 한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분은 오랜 기간 학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중간에 공공부문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던 분이라 나름 균형 있는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공공조직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측면과 그에 대한 나의 비판적 시각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공공조직을 폄하하고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공공부문은 어떤 면에서 혁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이 다소 촌스럽고 고루하며 부당한 의사결정체계와 문화를 갖고 있지만, 때때로 공공부문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야기는 '항상성'이라는 단어로 압축되었다.
항상성(Homeostasis)은 외부환경과 생물체 내의 변화에 대응하여 체내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을 일컫는 과학용어다. 기업의 경우 시시각각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숙명이 있다. 진화하지 않는 기업은 반드시 도태된다. 그래서 기업에서 혁신은 생존의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 그러나 공공부문은 단순히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따라서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함께 체내 환경을 안정화시켜야 하는 더 큰 목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공익이다. 공공부문에서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공공의 가치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부문은 외부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해서는 안된다.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부의 환경이 준비될 때까지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공공부문은 변화에 둔감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합리화로 비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결론적으로 공공부문은 어느 정도 답답하고 고지식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공공부문의 방만하고 나태한 본질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던 리영희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인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집단 지성은 있어도 집단 이성은 없다. 조직이 집단의 힘으로 개인이 추구할 수 없는 더 높은 지성을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집단이 갖는 한계 때문에 절대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조직에는 조직 논리가 있다. 그런데 조직의 주체가 조직원이라고 한다면 조직의 논리는 존재해서는 안된다. 조직은 조직원의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 논리는 개개의 조직원을 짓밟는 것도 허용한다. 여기에 어찌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말이다. 따라서 조직은 놀라운 지성을 발휘할 수는 있어도 합리적 이성에 의해 운영될 수 없다. 모든 조직이 그렇다. 공공부문도 예외일 수 없다.
대한민국 공공부문은 엘리트주의가 만연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수의 엘리트가 조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조직 논리를 자가발전시킨다. 극단적인 경우 그 조직 논리에 의해 조직의 수장인 최고의 엘리트가 희생되기도 한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체계가 있다면 좋겠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를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대안은 쉽게 나타나기 어렵다. 오랜 시행착오의 결과가 지금의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다만 이게 최선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정책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조직은 특허청과 공정거래위원회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려도 된다고 말이다. 너무 급진적인 이야기였지만 그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반드시 필요하고, 시장을 선도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특허제도가 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거래위원회와 특허청이라는 정부조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기관들이다. 그런데 나머지 정부조직은 뭐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그의 요지였다.
행정고시를 패스한 젊은 예비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수원 강의를 진행했던 노년의 행정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네들은 어떤 목적으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가?"라는 거창한 질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저의 역량을 발휘해 열심히 일해 보고 싶어서입니다"라는 뻔한 대답이 나오자, 교수님께서 자네들의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했던 말이다.
"자네들은 공무원으로 임용되고 나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네... 그러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려는 자네의 충직한 마음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을 것이네..."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한 전직 기자가 국가기관의 정무직 관료로 임명되자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공무원 출신 친구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차관직을 수락했는데 어떻게 하면 공무원들과 일을 잘해 볼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아랫사람인 공무원이 보고하는 말, 들고 오는 문서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으면 되네... 그러면 임기 중에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네"
젊었을 때에는 이런 급진적인 발언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런 류의 이야기가 치기 어린 도발 정도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 또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위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가정을 하였을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했던 모든 이야기도 결국은 앞에서와 같은 도발의 연장선일 뿐이다. 어떤 나라건 공공부문은 존재하며 그들의 역량과 조직력이 그 사회의 수준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선진적인 공공부문을 보유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처음 공공부문에 몸담았을 때에는 어떤 정책을 입안할 때 해외사례조사가 필수였다. 우리가 기획한 정책이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가 항상 관심사였다. 대표적인 벤치마킹 모델은 당연히 미국과 일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해외사례조사가 쉽지 않다. 해외 선진국가에서 시행된 정책 중에 우리가 고려했거나 반영하지 않은 정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공정책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Fast Follower를 넘어 First Mover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정책 입안과 추진에 있어서만큼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대한민국 공공부문이 일을 잘할 뿐만 아니라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공공부문의 역할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고 있다.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들은 일개 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이란 완벽하고 탄탄한 기획안이 아니라 실행력이다. 정책목표를 달성하고 예측한 정책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묵묵히 집행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폼나는 정책 발표와 보도자료가 아니라 시행착오를 줄이고 현장에 착근(공무원들이 아주 좋아하는 표현)할 때까지 긴 호흡으로 끊임없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실행력이다.
우리의 정책을 백화점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탁상행정 혹은 전시행정이라 말하는 이유는 항상 정책이 시작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어떤 공무원의 업적에도 정책을 실행하여 완성한 내용은 없다. 그러니 그 똑똑한 자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을 턱이 있는가? 그들에겐 자신이 입안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전임자가 발표한 정책이 가는 곳은 쓰레기통뿐이었다. 이것만큼은 명명백백한 공공부문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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