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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06. 2024

다시 만난, 남해

윤슬전망대의 공기는 맑았다.

정확하게 1년 만이었다. 작년 4월 말에 거제 한달살이를 서둘러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5월 1일에 우리는 다시 거제로 향했다. 나의 복직 이후에 불안이 높아져 학교와 집에 있는 시간이 힘겨웠던 아이는 결국 7주의 학업중단숙려제를 승인받았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에 맞추어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2박 3일의 짧은 남해여행을 떠났다.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추억과 아쉬움이 남았던 거제로 다시 향했다. 짧은 기간이라 좀 더 근사한 숙소를 잡았고 기억에 남았던 여행지를 다시 훑기 시작했다. 한 달 전의 여행기록이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몇 달 전부터 아이가 자주 했던 말이 있으니 아빠와 다시 한달살이를 가고 싶다는 거였다. 몸도 정신도 부쩍 좋아졌기 때문에 지금이야 말로 제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렇듯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희망과 어긋난다.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걷잡을 수 없었던 아이를 가급적 집에서 먼 곳으로 떨어뜨리려 시도했던 게 작년의 거제살이였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한가롭고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통제력을 잃은 마음이 멀쩡한 몸을 마비시켰던 탓이다. 그 소중한 시간 중에 숙소에 틀어박혀 보낸 게 절반이었으니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작년의 4월은 유독 비가 잦았고 내 마음엔 더 자주 비가 왔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자고 출발했던 거제행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카메라만 들이대도 기겁하던 아이가 먼저 사진 찍기를 요구해 왔다. 1년 사이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반가움이 들었으나 한편으로 그럼에도 다시 숙려제를 써야 했던 현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작년 거제살이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해금강-외도보타니아와 남해 독일마을에 다시 들렀다. 역시나 아이는 행복해했다.


외도보타니아
남해 독일마을의 소시지

여기까지는 예상된 결과였지만 나는 한 가지 도전을 더 해 보았다. 아이가 공황발작을 일으켰던 장소에 다시 가보는 일이었다. 아이에게 안 좋은 기억이 남았던 곳에서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지 궁금했다. 이 또한 예상대로 아이는 거뜬히 바람의 언덕을 올라갔다. 작년에는 수학여행온 또래들을 만나 중턱도 못 오르고 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지만 아이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거제파노라마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윤슬전망대는 예전처럼 기가 막힌 전망을 자랑했다. 딱 하나 달랐던 것은 흐린 날씨로 시야가 좁았던 지난해에 비해 한결 맑아졌다는 거였다. 아이는 케이블카 위에 설치된 루프탑 전망대까지 섭렵하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체력도 건강도 많이 회복했다. 빡빡한 일정인데도 아이는 잘 잤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3일 차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지만 아이는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이제 아이에겐 7주의 브레이크가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오랫동안 소원했던 이모할머니를 찾아뵙고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 아이의 이모할머니는 평생 교사생활을 하시며 독신으로 사셨고 젊어서는 나의 아내를, 은퇴하시고는 나의 아이들을 돌봐주신 분이다. 팔순이 훌쩍 넘으셔서 부쩍 기력이 쇠하셨고 지금은 서울 외곽의 동생댁에 기거하신다.


우울증이 있으신 이모님이 몇 년 전부터 건강까지 안 좋아지면서 두문불출하셨다. 그런 분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큰 걸음을 하셨다. 걱정과 다르게 이모님은 밝고 건강해 보이셨다. 약을 모두 끊고 규칙적인 운동과 식습관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한다. 오랜 교직생활이 몸에 뵈어선지 언제나 잔소리가 많으셨는데 어제는 하루종일 밝은 얼굴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응원의 메시지만 남기셨다.


거제 윤슬전망대의 맑은 날씨처럼 아이들의 이모할머니도 환하게 개어 있었다. 이제 내 아이가 갤 일만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배웅 나온 아이에게 이모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OO이는 착해서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OO이는 반드시 잘될 거야. 틀림없이 엄청 잘될 거야… 할머니는 믿어 “

“할머니가 성당에 가서 항상 기도할게… 할머니가 기도는 잘해… 해님 보고도 기도하고 달님 보고도 기도할게…“


어른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런 말에는 늘 울림이 있다. 진심이 담긴 말은 그랬다. 오랜만에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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