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났다
짧은 여름휴가, 하룻밤을 보내려 강원도 고성에 왔다. 이렇게 다닌 지도 6년 정도 되어서인지 이제 강릉 양양 속초 고성은 익숙하다. 성묘로만 30년을 넘게 다녔던 아버지의 고향, 전북 부안은 묵은 숙제를 해치우듯 당일치기로 후딱 다녀오던 탓에 그렇게 살갑지 않았는데 이곳은 제2의 고향이라도 되는 것 같다. 설악과 동해가 있는 천혜의 관광지라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부안에도 변산과 채석강이 있긴 하지만…)
루틴처럼 반복되는 여행코스는 이랬다. 아침 일찍 출발해 가평휴게소에서 떡라면에 충무김밥을 먹는다. 휴게소 라면의 맛은 여느 분식집보다 자극적이다. 평소라면 피하겠지만 여행이라 허락되는 호사다. 그리고는 양양이나 강릉에 들러 바다를 보고 점심을 해결한다. 강릉의 유명한 커피하우스나 벌꿀아이스크림은 부록처럼 따라붙는다. 이 정도 코스를 돌면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우리는 서둘러 고성의 숙소에 체크인을 한다.
울산바위가 보이는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요즘 핫풀레이스로 떠오른 아야진해변에 즐비해진 맛집에서 저녁거리를 포장해 와 술 한잔을 거하게 곁들이면 나의 첫날 미션은 클리어였다. 그러다가 초저녁에 곯아떨어지는 것까지는 평소의 루틴과 다르지 않았다. 새벽 두세 시 무렵 잠에서 께어 물을 들이켜고 아이들이 잘 자는지 에어컨바람에 춥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다시 잠에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새벽녘에 든 잠에서 오늘같이 기이한 꿈을 꾼 적이 없기에 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이 글을 쓴다. 언제나 함께하던 딸아이가 독일로 한 달간 연수를 간 탓에 오늘의 여행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반려견 호두로 조금 단출해졌다. 그래서였을까?
꿈에서 나는 집이었고 하교하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돌보시는 손녀를 지하주차장에 버려둔 채 꽃단장을 하고 외출을 했다. 아이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와 경비아저씨께 누가 울고 있냐고 물으니 이웃집 할아버지의 손녀란다. 아이가 걱정이 되어 내려가 보려 하는데 아들이 하교한다는 전화를 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라스틱으로 된 큼지막한 냄비 같은 물건을 손에 든 채 서둘러 아들을 데리러 나갔다.
밖에는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황급히 가지고 간 주방기구로 머리만 가린 채 교문 앞으로 뛰어갔다. 멀리서 아들이 우산을 손에 쥔 채 달려왔고 나를 만나고서야 우산을 펼쳤다. 녀석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데 학급에서 복지부장(?)에 선출되었다는 거였다. 그걸 하려면 아이들 앞에 나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어서 선생님께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단다. 그런데 표정은 밝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오는 내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내가 비로소 알게 된 건 이 아이가 엄청 어리다는 거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쯤 더 있는 고3 아이가 내 어깨에도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은 훨씬 앳돼 보였다. 아이의 공책에는 10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와락 끌어안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10년을 거슬러 너를 만나러 온 것 같다고 말하고 지하주차장에서 울고 있는 이웃집 아이를 데리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버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아이는 ADHD(정확히는 ADD) 판정을 받았고 그다음 해부터 아이들의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고 있으며 나는 이 아이를 간병하기 위해 작년 한 해를 휴직했었다. 모든 걸 바꿀 수도 있었던 10년 전으로 돌아간 나는 왜 잠에서 깬 것일까? 그리고 너무나도 생생했던 여덟 살의 내 아들은 왜 그토록 사랑스러웠을까? 나는 도저히 다시 잠에 들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두 시간만 있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섭국을 포장하러 가야겠다.
지하주차장에서 울던 여자아이가 아무래도 밟혀 독일에 간 딸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주말여행으로 폴란드를 다녀오는데 정전으로 기차가 두 번이나 멈췄다고 한다. 다행히 혼자 길을 잃고 울고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