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책임의 무한루프
부모 노릇이 쉽지 않다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아흔아홉 가지를 완벽하게 대응하고도 단 한 가지를 삐끗하면 모든 게 허물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함부로 호언할 수 없는 게 부모 노릇이다. 노릇의 사전적 정의는 맡은 바 구실이라고 한다. 구실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이라니 결국 부모노릇이라 는 건 부모라면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이다. 즉 노릇은 책임의 문제다.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일까?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놀아주고, 건강을 챙겨주고, 사랑해 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꿈을 응원해 주고...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규정지을 수 없었다. 부모 노릇을 망라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오만한 발상이었다. 49일의 학업중단숙려제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간 아이가 교문 앞 골목에서 공황약을 먹고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아 교실에 올라가지 못했다. 상담실에 들러 1교시를 채우고 조퇴했다.
49일이라는 시간으로 아이는 새로운 일을 찾았고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긴장을 조금 내려놓았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여전히 아이에게 힘겨웠다. 학교는 많은 것을 배려해 주었지만 내 아이에게 충분하지 못했다. 나 역시 학교에 충분한 배려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가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다만 충분함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 주길 바랐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했던 말은 아이의 사정이 딱하지만 저는 이 아이만의 담임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리 아이만을 챙길 수 없다는 뜻이었지만 거기는 형평의 논리가 끼어들 틈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은 내 아이만의 담임이 아니지만 내 아이의 담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었다. 모든 아이에게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형평의 논리일까? 다양성의 사회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한 대우란 무엇일까? 나는 내 아이에게 특혜를 베풀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다만 내 아이의 특수성을 고려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특수한 아이에게 특수한 대접을 해주는 것을 특혜라고 말한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특수한 아이를 배려할 만큼 그들이 한가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특수교사인 내 아내는 가끔 대소변을 못 가리는 아이를 챙긴다. 그 아이들은 다 자란 성인의 몸이지만 기저귀를 차는 아이와 다르지 않다. 내 아내가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특수아동이기 때문이고 대한민국의 특수학교는 그 일도 특수교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학급의 모든 아이가 대소변을 못 가리지 않는데 특별히 그런 아이를 챙기는 일이 특혜일까? 부모노릇을 이야기하다가 왜 애먼 선생님을 탓하고 있는가? 못난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노릇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디테일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 대하여 맡은 바 책임은 인과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낳았기 때문에 길러야 한다. 그렇다면 기른다의 정의는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다. 동물의 세계와 같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를 어떻게 기르던 그 결과는 하나로 귀결된다.
내게 조금 특별한 아이가 찾아온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가 태어난 이유도 모르는데 그 이유를 어찌 알겠는가? 그 아이가 특별해진 것이 태생적인 게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천적이라면 내 유전자가 절반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한 것이고 후천적이라면 내가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나는 과반 이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무능한 사람보다 무책임한 사람을 혐오한다. 무능한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지만 무책임한 것은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부단히 부모 노릇을 할 것이고 그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온전히 짊어질 것이다. 내가 그 책임을 소화해 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는 일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