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아니라면 가족이 아니다.
우스갯소리지만 남편을 '남의 편'의 줄임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2년 차 남편으로서 나 역시 이 농담 같은 말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내에게 늘 구박을 하고 있으니 그렇다. 신혼 때부터 아내에게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지만 둘째가 우울증 투병을 시작하고부터는 내가 느끼기에도 심하게 구박댕이가 되었다. 내 아내는... 물리적 폭행을 가하지 않을 뿐 내가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뜨끔해 질만큼 아내에게 심하게 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일로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어버이날 큰아이에게서 카네이션이 담긴 꽃병과 카드를 한 장 받았다.
나는 아이의 글귀 중 '내 편'이라는 단어에 꽂혀 버렸다. 이 아이가 나를 자기편이라고 확신하고 있구나. 내가 이 아이에게만큼은 진심을 전달하였구나. 예사로 쓴 글귀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 아이와 나 사이에 쌓인 시간들이 '내 편'이라는 단어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이의 꿈을 응원하고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아이는 엄마, 아빠에게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게 하고 있는 말이란 걸 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물론 이걸 아빠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가족을 내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모르지만 엄마나 형제들에게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형들이 결혼을 하고 조카가 생기는 걸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확실히 한편이었다. 아이를 특별히 예뻐하지 않았지만 조카들에 대해서는 유독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도 유전자를 일부 공유해서인지 모르겠지만 특히 큰 조카아이에게는 각별했다. 그런데 형과 형수와 조카는 분명 한편이라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들과 가족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도 내 편을 만들어야겠구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지금껏 극진하게 키우는 이유는 그랬다. 나는 내 편이 필요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전적으로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줄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내 편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었다. 내가 전적으로 그들의 편이 되었을 때 가족은 한 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건 팩트다. 따라서 아내는 내 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아내를 구박댕이로 만들었지만 사실 아내 편이다. 왜 그런고 하니 편은 그것을 가를 대상이 있을 때에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내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을 상대할 때 당연히 나는 아내의 편이다. 아내가 미울 때가 있는 것은 바깥을 향해서가 아니다. 가족끼리 힘들고 어려울 때 아내가 도움이 되지 않아 서운한 것이다. 내 가족구성원이 아닌 누군가가 아내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거나 공격한다면 나는 완벽하게 내 아내의 편이 될 것이다. 내 어머니를 상대할 때에도 나는 그랬다. 어머니는 그게 언제나 서운하셨지만 아내가 서운한 것보다는 당연히 그것이 나았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아내 역성을 들었다. 언제나.
세상에서는 편 가르기를 좋지 않은 행위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불사하는 속물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가족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한편이 되어야 한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편 하나 없을 때만큼 서러운 일은 없다. 그때 가장 절실한 것이 가족이다. 내편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가족의 연을 끊는 게 맞다. 내 주변의 가족들은 외가나 본가나 처가를 막론하고 한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가족을 꾸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들이 결혼하여 가족을 꾸렸는데 할아버지부터 손주들까지 한편이라면 세상은 거대한 패거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늘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이 되는 가족은 딱 한세대가 적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한세대의 가족이 한편이 되어 다른 형제의 가족과 싸우는 일이다. 이 것만큼 흉측한 일도 없다. 즉, 한 때 한편이었던 가족이라면 최소한의 우호관계는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저 유명한 개그콘서트의 전설적인 코너, '가, 족같은'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그 원인이 경제적인 것이든 그 이상의 것이든 집안싸움처럼 꼴불견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수히 본다. 그래서 가족인지 가식인지 구분가지 않는 모임을 하곤 한다.
내 이야기의 결론은 이거다. 나는 내 편을 만들기 위해 가정을 꾸렸고 최선을 다해 그들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랬더니 그들도 어느새 내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모든 바깥 것들을 욕해 주곤 한다. 그것이 내가 집에서 술을 마시는 유일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가족은 그래서 필요했다. 나처럼 내 편이 필요한 유약한 사람에게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