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의 힘
경상도의 한 초등학생 '안득기'의 슬픈 사연을 아는 이들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들리다'를 '듣기다'로 말하는 사투리의 피해를 온몸으로 입었던 '안득기' 학생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름을 묻는 선생님에게 자신의 이름인 '득기'와 '안득기'를 번갈아 대답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이 '안'씨였던 것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안득기 학생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익숙한 우스갯소리로 회자되어 왔다.
그런데 이름이 아니라 진짜 '안 듣기(안 들리)'는 건 한편으로 더 슬프면서도 명백한 유죄다. 우리 아들처럼 돌발성 난청이거나 타고난 청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의집중력이 부족하여 남의 말을 흘려듣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남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모든 이들을 과연 집중력 부족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남의 말 따위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의식 과잉인 경우도 있지 않을까?
내 아내는 성인 ADHD를 앓고 있다. 앓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질병을 질병으로 인식하는 데에만 22년이 걸렸으며 현재도 그 병세로 인해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정녕 힘든 건 22년간 그녀와 살아온 나의 몫이었고 이제는 아이들의 몫이기도 하다. 아내의 흘려듣는 버릇을 빗대어 나는 그녀의 증상을 '안 듣기' 유전자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주의력이 부족하여 살뜰히 살피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엄마를 아이들이 원망할 때마다 나는 엄마 잘못이 아니라 엄마 안에 내재된 '안 듣기' 유전자의 탓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잘못한 게 없어... '안 듣기'가 있는데 엄마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어...라고 말이다. 처가에 가면 아내의 유전질환이 더 분명하게 각인되곤 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은 모두 강력한 '안 듣기' 유전자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이야기만 반복할 뿐 누구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안 듣기 유전자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증명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말이다. 안 듣기 유전자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아내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주변의 모든 노이즈를 제거한 뒤 아내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마주한 채 또박또박 한 단어씩 전달해야 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다만 일상적으로 그런 시도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은 없다. 누군가 안 듣기 유전자를 무력화시키는 약을 개발한다면 나는 그를 평생 우러르며 살 것이다. 안 듣기는 유죄다.